서심화야 17회차
'너희들은 같은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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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대학 경영학과 85학번 연말 동창회가 열리오니 참석을 희망하시는 귀하는 함께 첨부한 사진의 장소와 시간을 맞춰...]
K씨에게 오랜만에 찾은 혜화는 여전히 젊음의 공간이었다. 각종 현란한 불빛들로 밤임에도 대낮같은 대학로 거리를 걸으며, K씨는 제 모습이 우스워 보일 걸 알면서도 두리번 거리는 것을 멈추기 힘들었다. K씨의 기억 속에서 혜화는 분명 지금같은 대학생들의 거리였지만 이렇게 화려한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여러 대학의 중심지인데다가 사람들이 가장 많은 서울이다 보니, 손을 타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K씨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세월이 흐르긴 많이 흘렀어, K씨의 작은 되뇌임이 손등으로 훔쳐내는 이마의 땀과 함께 사라졌다.
"아저씨, 연극 보세요. 이거 저희가 야심차게 준비한 연극인데 후회 안 하실 거에요."
반짝이는 눈을 한 여대생 하나가 건네는 전단지를 얼떨결에 받아들으며 K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이런 전단지 돌리는 사람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K씨였다. 조잡하게 프린팅 된 전단지에는 삼류 연애소설에나 어울릴법한 제목이 적혀져있어 K씨의 귀를 붉어지게 했다. 얼른 전단지를 구겨 버리려던 K씨의 눈에 그 여대생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전단지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대학생은 그 이름만으로도 싱그러움을 지니고 있는 걸까. 얇은 코트차링에 입가에선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데도 추운 줄 몰라하는 여대생의 모습을 보던 K씨는, 다시 보아도 민망한 전단지를 반듯히 접어 제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보러 가진 않겠지만, 적어도 주는 사람 앞에서 버리진 말아야지 싶은 마음에서였다.
대학로는 여기저기에서 잡는 손길이 많았다. 간신히 약속시간에 맞춰 들어간 고깃집은 맛집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곳이라더니, 온통 지글거리는 소리와 냄새로 천지였다. 저, OO대학교 동창회 예약석이 어딥니까? K씨의 물음에 급히 쟁반을 나르던 종업원이 손가락으로 커다란 내실을 가리켰다. 딱 보아도 가장 큰 방이었다. K씨는 거침없이 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이미 떠들썩한 대화들로 가득했다. 몇몇 중년 남자들이 들어온 K씨를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야, 너 K냐? 나 회장이던 N이다. 그대로네, 자식. 얼른 제 옆자리를 비워주는 N씨에게 다가가며 K씨는 그를 티나지 않게 위아래로 흝어보았다. 이전 동창회 때마다 일이 생겨 몇 년만에 만나는 얼굴이었는데, 그새 살이 더 우둥퉁히 올랐다. 일부러 신경쓰고 온 것이 분명한 고급 양복과 넥타이핀, 커프스. 요새 어디어디 대기업에서 잘 나가고 있다던 말이 틀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의 옆에 앉은 K씨는 괜히 제 옷을 한 번 가다듬었다. 큰맘먹고 지른 솔리드 옴므였다. 어차피 술 마시고 놀텐데 뭐하러 비싼 옷 입고 가냐는 아내의 잔소리를 감수하길 잘 했다고 K씨는 생각했다.
익숙한 듯 낯선 얼굴들과 한두마디씩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음식과 술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우가 불판에 닿자 치이익, 하고 시원한 소리를 내며 밑면이 노릇해지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에도 넉살 좋았던 M씨가 김치와 마늘같은 것들을 집어 함께 불판에 올렸다. J씨는 소주를 따 한 잔씩 돌렸다. 고기가 익길 기다리며 K씨도 소주잔을 받아 한 잔을 쭈욱 들이켰다. 후레시만 마시던 K씨에게 클래식, 흔히 빨간 거는 좀 세다 싶었지만 괜히 웃음거리가 되고 싶진 않아 K씨는 조용히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너 아직도 울산에서 일하냐? XX기업이라며. 요즘 거기 주식도 점점 높아지고 있지."
"뭐, 원래 평판 좋은 곳이었으니까 시기가 잘 맞은 모양이야. 너는 △△기업이라며. 니 소문 자자하더라, 임마. 니가 우리들 중에선 제일 높은 놈 아니냐?"
"시덥잖은 소릴 다 하네, 새끼. 다들 잘 나가고 있는데 높고 말고가 뭐 있냐? 그냥 적당적당히 잘 풀리고 있지."
허허 웃는 N씨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말은 저렇게 해도 제일 높은 놈이라는 말이 기분이 좋았음이라, K씨는 내심 속물근성이라며 비웃어보이곤 그와 자신의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마침 고기도 적당히 익은 모양이었다. 연한 갈색으로 기름 자르르하게 구워진 고기를 입 안에 넣자 육즙이 주륵 흘렀다. 맛집이라더니, 역시 고기가 훌륭했다. 이 나이에 밥심 없으면 술도 못 마시지, K씨는 입 안 가득 고기를 질겅거렸다.
분위기가 완전히 무르익고 여기저기서 회사 얘기, 가족 얘기, 정치 얘기들이 고기 대신 안주거리 삼아 씹히기 시작했다.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K씨도 동참해 바가지 긁는 마누라 얘기로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잠시 얘기에서 빠져 소주를 마시는데 문득 저와 같이 음식을 먹고 있는 이들의 표정이 K씨의 시선에 밟혔다. 하나같이 덤덤한, 어쩌면 권태로운 듯한 표정들이었다. 말을 꺼내고 있을 때는 그런 표정들이 사그라들었지만, 입을 다물면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러고보니 예전 동창회에서도, 아니, 어디를 가도 다 이런 얘기들뿐이지 않나 싶었다. K씨는 소주잔에 얼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과 다를 게 없었다.
야, 너 동근이 얘기 들었냐? 제 팔을 툭 치며 부르는 N씨의 말에 K씨는 얼른 표정을 정리했다. 동근이? 그 뭐냐, 그림그린다고 회사 그만둔 놈? 얼핏 익숙한 이름의 기억을 되새기고 있는데, 둘의 얘기를 들은 J씨가 끼어들어 말을 꺼냈다. 너도 들었어? 그 새끼 결국 고향 내려갔다며. 그래도 나름 회사에서 잘 나가던 녀석이었는데, 별 미친 짓 하더니 결국 그 꼴 났지 뭐.
K씨의 머릿속에 동근이라는 이름이 그제야 확실히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N씨와 같은 회사에 다니던 이였다. 촉망받는 사원으로, 그들 중에서 승진도 제일 빨랐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7,8년쯤 전에 갑자기 미술을 하겠다며 회사를 그만 둔 것이다. 두문불출하는 그의 행적은 크고 작은 모임에서 항상 회자가 되기 마련이었다. 사정이 안좋다고 예전에 들었는데, 결국 시골 신세를 지게 된 모양이지. K씨는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가끔 있었다. 그렇게 겉도는 한심한 녀석들이.
문득 K씨는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어린 딸과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늦둥이 막내딸인 유독 성격이 좋아 다른 자식들과 달리 아빠와도 잘 어울렸다. 동창회때문에 서울에 간다니까 그새 관심을 보이는데, 그것이 어쩌다보니 오랜 졸업앨범을 펼치게까지 되었었다. 친구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옛날 얘기를 해 주는데 딸이 물었다.
'아빠, 그럼 이 아저씨는 이제 뭐 해?'
'이 아저씨는 서울에 높은 회사 부장님이야. 여긴 다른 회사 차장님이고. 다 높은 사람들이고 돈도 잘 벌어.'
'아빠 친구들은 다 그런 사람들밖에 없어? 가수나 연예인은? 개그맨은?'
K씨의 딸은 부장 차장이라는 말에 금세 흥미를 잃은 듯 했다. 지루한 표정의 딸을 보며 K씨는, 네가 조금만 크면 그걸 부러워하는 때가 올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 동근이 얘기를 해 줬으면 아이가 좀 재미있어 했을까, 다 똑같은 놈들 사이에서 그 녀석 하나가 그나마 좀 특별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던 K씨는 다시 소주잔을 들이켰다. 새삼 딸의 말대로 다 똑같은 녀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통 권태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타임과 솔리드 옴므들 뿐이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술이 홧홧하고 썼다.
술자리가 끝나고, 몇몇 녀석들은 2차를, 또 포커를 치러 가자며 제각각 무리를 지어 떠났다. K씨는 타지에서 과하게 취하는 것도, 여기저기 끌려다니는 것도 싫어 살짝 몸을 뺐다. 이 상태로 차를 몰긴 무리라, 대리를 부르고 담배 한 대를 피워물고 있는데 N씨가 그에게 다가왔다. N씨 역시 2차는 가지 않은 듯 했다.
"너도 대리 기다리냐?"
"그렇지, 뭐. 서울 대리비는 울산보다 더 비쌀려나."
술기운에 흐릿한 시선에도 N씨의 비싼 양복에서 고기냄새가 확 풍겨오는 게 느껴졌다. 남은 냄새가 썩 좋지만은 않아 K씨는 담배연기를 훅 내뱉었다. 제 양복에도 똑같은 냄새가 배어 있겠지, 드라이를 맡기면 돈이 꽤 나올 것이다. K씨는 괜히 객기를 부리느라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후회했다. 비싼 양복이라고 고기냄새가 향긋하게 배는 것도 아닌데.
"야, 동근이 말이다."
할 말은 이미 고깃집 안에서 다 했고, 괜히 줄담배만 피우는데 N씨가 먼저 K씨에게 말을 걸었다. 술기운때문에 붉게 달아오른 N씨의 표정이 익숙한 권태로 가득했다. K씨가 듣고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N씨는 잠시 쿨럭쿨럭 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가끔 그 녀석 결정이 이해 될 때가 있다. 좀 부럽다고 해야할까."
"별 소리를 다하네. 취했냐, 임마? 잘 나가는 전무님이 뭐가 부족해서 그런 새끼가 부러워."
"잘 나가긴 개뿔이. 여기서도 다 똑같아. 윗사람 눈치보고, 돈 찔러넣고, 받고. 얼마 전에도 승진건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그 새끼한테서 동창회 못 온다고 연락이 오더라. 뭐, 무슨 전시회가 있다나. 거기서도 계속 그림은 그리나봐. 근데...좀 부러운거다. 난 취미생활도 다 윗
사람들이랑 같이 다니는 걸로 끊었는데, 그 새끼는 쪼들려도 지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잖아. 그래, 거 뭐냐, 꿈이 있잖냐."
N씨의 말소리는 더 이상 여유롭고 당당하지 않았다. K씨는 이 새끼 취했다며 등을 두드려주긴 했지만, 그의 말이 취해서 내뱉는 허언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회사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충이었고, 다 똑같은 일상이었다. 어쩌면 아까 동근이를 비웃은 녀석들도 내심 그런 동근이를 부러워하는 마음에 더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K씨는 생각했다. J씨도, M씨도, 제 옆에 있는 N씨와 어쩌면 자신도. 그들은 모두 승진이라는 똑같은 목표만 바라보고 억지로 타임과 솔리드 옴므를 입고 있을 때, 동근이는 편한 옷을 입고 제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 테니까.
대리가 왔다. K씨와 N씨는 별 말 없이 짧은 인사 후에 제 차에 올랐다. 술기운에 뒷자석에 살짝 늘어진 K씨는 문득 제 주머니에서 뻣뻣한 것을 느끼곤 그것을 꺼냈다. 아까 받았던 대학생들의 연극 전단지였다. 유치한 제목들, 마누라가 좋다고 보는 드라마만큼이나 뻔할 내용들. 전단지 위로 아까 그 여대생의 얼굴이 언뜻 비친다 싶었다.
아저씨, K씨의 말에 대리가 운전을 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계속 갑시다. 싱거운 K씨의 대답에 대리는 잠시 표정을 찌푸렸으나, 곧 네네 하며 다시 차를 몰았다. 서울 시내의 빽빽한 고층빌딩 사이를 달리는 차 안에서 K씨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K씨의 손에 들려있던 전단지가 툭, 시트 아래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