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문장실습 과제
위 소설의 다음 상황을 상상해 이어쓰기를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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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지직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익숙해야 할 목소리가 들렸다. 한순간 그 목소리가 전해주는 안도감에 하마터면 몸의 긴장을 놓을 뻔 했다. 등골이 쭈뼛했다. 정신을 차리곤 다시 몸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어머니.”
“그래, 갑자기 웬 일이냐? 요즘 통 연락 없던 애가.”
수화기 건너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너무나 담담해 오히려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어머니, 당신 아들이 지금 절벽에 매달려 있어요. 간신히 핸드폰을 꺼내서 어머니한테 연락을 걸었는데 그 도중에도 몇 번이나 떨어질 뻔했어요. 나 죽어요, 얼른 좀 살려주세요?
참, 한시가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처한 이 상황에 헛웃음이 났다.
“저, 어머니. 일단…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무척 진지한 거니까 끊으시면 안 돼요.”
“무슨 소리니? 오랜만에 연락해서 영문 모를 소리만 하고.”
“그게…. 저, 어머니. 일단 식사는 하셨어요?”
이 얼마나 훌륭한 동방예의지국의 인사인가. 목숨을 걸고 건 전화로 처음 하는 말이 식사는 하셨냐는 안부 인사라니. 남들이 보면 저거 병신새끼 아니냐고 혀를 차겠지만, 어째서인지 그 말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나와 똑같이 절벽에 매달려 있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심정 아닐까.
아들의 싱거운 질문에 어머니는 잠시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오늘 뭐 잘못 먹었니? 애가 맥 빠지게.”
“그렇긴 한데…, 오랜만이잖아요. 아들이 식사 안부정도는 물을 수도 있죠.”
“평소에나 그렇게 하지 그랬니? 먹었다, 먹었어.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있으니 걱정 붙들어 매렴. 그러는 너야말로 밥 먹었니? 슬슬 반찬 가져다 줄 때가 된 것 같은데.”
“아직 조금 남아있으니까 천천히 보내주셔도 돼요. 제가 언제 시간 날 때 가지러 가야하는데.”
이대로 있으면 평생 못 가지러 갈 것 같지만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나는 계속해서 어머니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아프신 곳은 없는지, 요즘 황사가 자주 부는데 마스크는 꼬박꼬박 챙겨 나가고 계신지, 아버지와 싸우지는 않으시는지. 어머니는 심각한 분위기로 시작된 대화가 이런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에 미심쩍어하는 눈치셨지만, 워낙 간만의 대화라 그런지 별 의심 없이 대답하셨다. 평소처럼 허리가 조금 쑤시긴 하지만 괜찮다, 나가봐야 고작 마을 친구네나 마트 정도가 고작인데 무슨 마스크까지 챙기느냐, 니 아버지랑 싸우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닌데. 몇 번이고 생을 마감 할 뻔한 일상적인 대화가 끝나고 나서야 나는 본론을 말할 수 있었다. 예상외로 안부를 묻던 것과 별 다를 게 없는 어조였다.
“근데 어머니, 제가 지금 절벽에 매달려 있어요. 119좀 불러주세요.”
“뭐?”
“그러니까…, 지금 절벽에 매달려서 어머니랑 통화하고 있다고요. 곧 떨어질 거 같으니까, 119 좀 불러주시….”
툭.
뚜-뚜-뚜-
정처 없는 신호음만이 맥없이 끊긴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이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손길이 끊어져 버렸는데, 나는 예상 외로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것도, 전화가 끊어질 것도 예상하고 있었던 듯. 전화가 끊기자 몸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외출하실 땐 황사마스크를 꼭 하고 나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때였다.
“거기 사람이요? 이봐요!”
눈을 떴다. 얼마나 감고 있었다고, 눈이 부시는 것을 몇 번이고 깜박인 후에야 겨우 시야가 트였다.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놀랍게도 한 중년 남성이 나를 발견하고는 두꺼비 같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는 것을 보더니 급하게 핸드폰을 꺼내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아까 전에 했어야 할 말을 외쳤다.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이 매달려 있어, 살려줘요!”
“거 조금만 버티쇼! 지금 전화를 걸고 있으니까… 거기 119죠? 여기 좀 빨리 와요! 절벽에 사람이 매달려 있다고!”
“씨발, 얼른 오라고! 이러다 떨어지겠어!”
아까의 침착함은 어디로 갔냐는 듯 호들갑을 떠는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떠는 아저씨가 급히 전화를 마치고 내 쪽으로 겅중겅중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생각과 함께, 웃기게도 어머니에게 안부 전화를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때가 아니면 또 언제 전화를 할 생각을 하겠나. 평소엔 일하느라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하고, 그래서 얼마 전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몇 개월이 넘도록 연락을 안 드렸지 않았던가.
…어?
“버틸 수 있겠수? 나뭇가지라도 가지고 와요? 어쩌다가 그렇게 됐대! 조금만 기다려요, 소방서가 여기 근처인 걸 아까 봤으니까 금방 올 거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아저씨의 목소리가 생경스럽게도 컸다. 보통 이런 상황에 영화나 드라마에선 안 들린다고 하지 않나? 너무 생생하게 들려 오히려 실재가 아닌 것 같은 아저씨의 호들갑소리를 흘리며, 동시에 나는 아까 전 어머니와의 통화를 생각했다. 몇 주 전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통화. 생사의 기로에서 태연하게 이어지던 평범한 안부 인사들. 살아계실 때에는 하지 못했던, 지직거리는 휴대폰 수화기를 통해 나눴던 대화들.
흥분한 아저씨의 목소리는 여전히 귓가를 찔렀고, 이어 삐뽀삐뽀 거리는 소방차 소리와 함께 다급한 발걸음들이 몰려왔다. 내가 살 수 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온 몸으로 살아있음을 느껴야 할 순간에,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