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사모케이건] 하텐그라쥬가 보았던 것
도노 헤세
2016. 3. 12. 23:36
하텐그라쥬.
키보렌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담고 있던 땅, 가장 많은 이들이 애정 했던 땅, 가장 영광스러웠으며 가장 많은 햇빛을 받았던 땅.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땅.
더 이상 손을 대는 이가 없어 불규칙하게 자라있는 나무들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숲 사이로 유난히 돋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이 주위로는 어떤 나무도 풀도 자라지 않고 유일하게 고요함을 표현하는 듯한, 그리고 무게를 지키고 있는 나무. 우리는 그 나무의 이름을 아스화리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나무를 손에 댈 수 없다. 가장 거대한 레콘도 날려버리는 대선풍이 아스화리탈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스화리탈 안에 있는 뇌룡공(雷龍公)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제 3차 대확장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기 위해 몸을 바쳐 투신한 뇌룡공을 모두가 기억할 수 있도록, 또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도록 아스화리탈은 자신의 몸을 굳히고 폭풍을 끌어들여 이 자리에 있었다.
그 안으로, 한 사나이가 낯익은 발자국을 찍어낸다.
영원히 영광으로 남을 하텐그라쥬는 그 발자국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무수한 이가 짓밟고 갔지만 하텐그라쥬는 어느 누구의 발자국도 잊지 않는다. 잔뜩 쌓인 낙엽과 석장이들 위를 밟고 오는 무게를 하텐그라쥬는 분명히 알아차렸다. 선바람이 분다. 바람이 이 낯익지만 새로운 여행자를 맞을 준비를 한다.
당신은 누구?
사나이는 머리 위로 푹 눌러쓰던 후드를 뒤로 넘긴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후드에 눌려 이마에 흐트러져 있었다. 대충 그것을 정리하고는 사나이는 고개를 치켜든다. 적당하게 탄 피부, 단단한 턱선, 후드를 입었음에도 그 덩치가 드러나는 떡 벌어진 어깨가 사나이의 풍채를 보여준다.
그리고 하텐그라쥬는 다른 것 또한 본다. 사나이의 주변으로 흐르고 있는 잔바람의 기류를. 그리고 사나이의 어깨에 얹혀져있는 무수한 세월의 깊이를. 그것은 하텐그라쥬와 같거나, 혹은 더 예전의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화석인 사나이가 숨을 들이킨다.
그리고, 크게 내뱉어-
“사모 페이!”
몇 년간의 침묵을 모조리 부수려는 듯 사나이의 목소리는 깊고도 우렁차다.
“사모 페이, 그대의 맹약자가 왔어. 그대에게 무릎 꿇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자가 널 찾아왔다!”
여행의 마지막 자리에서, 사내는 한참이고 대답 없는 하텐그라쥬를 둘러본다. 자신이 기다리는 유일한 주군을 향해. 그러나 그가 기다리는 이는 나타나지 않고 맴도는 것은 가끔 떨어지는 낙엽뿐이라, 그리도 단단해 보이던 사나이의 다리가 푹 무너진다.
우렁차던 목소리가 점차 먹혀들어간다.
“제발, 이곳에서는 모습을 보여. 사모.”
무언가에 잠기듯 먹혀들어가던 목소리는 점차 큭큭이는 숨소리로 바뀌고 바람은 매몰차게 사나이의 머릿결을 살랑일 뿐이다. 그것이 손길인 양 별안간 고개를 흔들다가도 아무도 없는 주위에 실망하며 사나이는 이를 꽉 깨문다. 키탈저 사냥꾼의 맹세를 한 자는 눈물조차 허락 없이 흘릴 수 없기에, 감히 그것을 거스를 수 없는 자이기에 이빨을 부서져라 악무는 것으로 눈물을 삼켜낸다.
그리고, 하텐그라쥬는 새로운 아스화리탈을 맞는다. 움직이지 않는 사내의 위로 낙엽과 먼지들이 소복히 쌓여간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사내는 눈조차 깜박하지 않은 채, 겨우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가끔 가슴만을 들썩이며 자리를 지켰다. 사내의 머리는 이미 낙엽들이 잔뜩 쌓여있고 어느새 외부의 냄새는 사라져 숲의 향기만이 사내의 몸 곳곳에 배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숲에게 먹힐 듯, 숲을 먹을 듯. 아스화리탈만이 유일한 기둥이었던 하텐그라쥬에 새로운 기둥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기둥은 나무가 아니다. 고기를 뜯고 물을 삼키며 연명해야 하는 한낮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이 무정히 버틸 수 있는 시간을 훌쩍 넘긴 사나이의 몸이 점차 기우뚱해진다. 며칠간이나 뜨고 있던 눈이 깜박이고, 단단한 몸이 만지면 패일 듯 스러져간다.
그리고, 쓰러진다.
탁.
“멍청한 인간.”
“…사모 페이.”
“멍청한, 이 멍청한. 케이건 드라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인간 같으니.”
“사모 페이, 내 주인.”
“그래. …네 주인이 여기 있어, 케이건.”
하텐그라쥬가 되려던 여자가 있었다. 아스화리탈과 뇌룡공의 곁에서 자신의 일부분을 더해 단단한 기둥이 되려던 여자였다. 속세의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쳐 나와 유일히 아무 것도 저에게 바라지 않는 동생의 곁으로 여자는 도달할 수 있었다. 억지로 끊어낸 것들을 매일 생각하면서, 시간을 쌓아 그것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수족마저 잘라내진 못했음이라. 그녀가 떼어내려 했던 것은 한낱 장신구나 옷가지 따위가 아닌, 신체의 일부였다.
그리고 그 일부가 지금 찾아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다.
“눈이 감겨. 사모. 떠나지 말아, 제발.”
“내가 떠나도 너는 기어코 찾아오겠지. 떠나지 않을게, 케이건. 다시는 나의 용의 수호에서 도망치는 일 따위 없을 것이다.”
“다시는.”
“다시는.”
잠시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좋아져 있을 거야. 속삭이는 미성을 들으며 주인을 찾은 용은 곤한 잠에 빠져든다. 찰나의 꿈을 꾸고 깨어났을 땐 그녀의 말처럼 모든 것이 좋아져 있길 바라며,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을 날을 기다리며. 그는 그동안 악몽으로만 가득했던 꿈으로 스스로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