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사모케이건] 남자들은 전부 바보라던데.

도노 헤세 2016. 3. 12.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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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건, 이리 와 봐.”

 아라짓 대학교의 하루는 늘 그렇듯 맑고 푸르다. 자신을 부르는 미성의 목소리에 케이건은 주섬주섬 챙기던 책들을 뒤로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를 뒤로 숨긴 사모는 그의 의아한 표정에 싱긋 웃으며 손을 까딱였다. 뭐지? 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가 인적이 드문 강의실 뒤편으로 케이건은 걸어갔다. 사모의 앞이었다.

 “왜?”
 “줄 거 있어. 더 가까이 와 봐. 남들이 보잖아.”
 “…과제라도 몰래 보여주려고?”
 “하여간 생각하는 것 하고는.”

 그게 아니라면 뭔가. 도통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케이건은 한 발짝 더 사모에게 다가갔다. 손이 닿을 정도로 다가오자 사모가 그의 팔을 확 끌어당겨 몸을 밀착한 뒤 뒤에 숨겼던 것을 그의 품 안에 안겼다. 어어, 눈 깜짝할 새에 제 품에 담긴 종이봉투를 보고는 케이건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선물,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가까이 울렸다.
 선물? 케이건은 무심히 종이봉투를 뜯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이런 멋대가리 없는 남자, 하고 사모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민망함보단 궁금함이 더 컸다. 부시럭 소리와 함께 종이봉투가 뜯겨나가고 안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옷이군.”
 “뭐야, 감상평은 고작 그게 끝?”
 “갈색이고 따뜻해 보이는 옷.”
 “아. 케이건. 넌 정말이지, 정말 멋이라고는 1만큼도 없는 남자야.”

 사모가 한탄하는 소리에도 케이건은 그런가, 하고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품 안에 놓여 진 갈색 스웨터가 아직 사모의 온기를 먹은 탓인지 따뜻했다. 평소에 옷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 아무거나 입는 케이건이었지만 어쩐지 이 스웨터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골라준 옷이라 그런 걸까?
 툭, 사모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 케이건이 멀뚱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사모는 아까의 한탄하던 표정을 버리곤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감상평이 끝났으니 이젠 무슨 말을 해야하지?”
 “…고마워.”
 “맞았어! 이럴 땐 그렇게 멍청한 남자는 아닌데.”
 “바보 취급 하지 마라.”
 “바보잖아. 선물을 받고도 고맙다는 말도 못하는 바보.”

 바보, 나 다음 강의 있어서 먼저 가야돼. 옷 잘 입어! 짐을 챙겨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사모의 뒷모습을 케이건은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바보 취급을 당하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품에 안긴 스웨터가 맘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그 자리에 있던 케이건은 이윽고 자신의 다음 강의가 벌써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곤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케이건이 그 옷을 입는 날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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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수백 합을 두고 나서야 그날의 대련이 끝이 났다. 사모와 케이건은 달아오른 숨을 헉헉거리며 목검을 내려놨다. 후배들이 건네주는 음료수를 따며 둘은 다음 대련 시합이 벌어지는 강당 중앙에서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이온음료가 마치 탄산이라도 들어간 양 찌르르하게 목젖을 울렸다. 절로 크으, 소리를 내며 케이건은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사모도 마찬가지라 똑같이 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모가 깔깔 웃음을 터트리는 이유를 케이건은 몰랐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오늘도 대단했어, 케이건. 하마터면 밀릴 뻔했다고.”
 “밀리지도 않았잖아. 나야말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았으면 당했었을 것 같군.”
 “우리 대련은 정신 싸움이야.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방심하는 사람이 지는 거야.”
 “틀린 말은 아니야.”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래? 그녀의 말에 케이건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 후에 함께 밥을 먹으러 가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뒤에선 그런 둘을 보며 사귀는 거 아니냐는 쑥덕임이 나오고 있지만 사모와 케이건 둘 다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씻으러 남자 전용 욕실로 들어가며 케이건은 땀에 절은 도복을 벗어던졌다. 탄탄하게 근육이 배긴 몸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고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끈적끈적했던 몸이 물을 맞아 상쾌함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술을 마실까. 내일 과제가 있긴 한데, 사모한테 보여 달라고 하면 되겠지. 태평하게 부정을 저지를 계획을 세우며 케이건은 몸을 닦고는 수건으로 물에 젖은 머리를 털어낸 뒤 집에서 입고 왔던 옷을 껴입었다. 늘 입고 다니는 허름한 티셔츠에 청바지 그대로였다. 심지어 목조차 늘어나 사모가 매일 그것 좀 버리라고 잔소리를 했던 옷이다. 하지만 편한 걸 어쩌리오.
 말끔하게 닦고는 밖에 나가니 아직 사모는 벌써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나가였지. 케이건이 나가들에게 부러운 점은 인간처럼 신경을 써서 씻고 말리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인간은 너무 해야 할 것이 많다. 물로 씻고, 수건으로 말리고, 그러고 나면 또 머리를 말리고. 물론 그는 머리가 덜 마른 채로 밖에 나와 좀 부석해지는 것 따윈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아, 나왔어? 반갑게 고개를 돌린 사모는 케이건의 모습을 보고는 팩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갑작스럽게 식는 분위기에 케이건이 당황해서 그녀를 내려 보자 사모는 오랫동안 참았다는 듯 하이 톤의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케이건.”
 “…응?”
 “왜 내가 사준 옷 안 입어? 언제까지 그런 허름한 거 입고 다닐 거야?”

 어, 그러니까, 그 옷 때문에…? 케이건이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사모는 홱 몸을 돌렸다. 그리곤 한 마디 인사도 없이 타박타박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아, 안돼. 내 내일 과제가! 케이건은 급히 그녀를 따라가 팔을 잡았다. 잔뜩 째진 눈이 그를 향했다. 분명 아까까지 씻고 나왔는데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이 서늘했다.

 “왜? 사줬는데도 버려두고 남의 성의 무시하는 사람하고는 할 말 없어!”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사준 옷 입고 나온 적 없지? 왜인데? 말해 봐!”
 “그게….”

 케이건은 어쩐지 귀가 빨개진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싫어서 그런게 아니고. 그 이유는….

 “…사모. 네가 사준 옷인데, 닳을까봐.”

 잠깐의 정적.
 혹여나 그녀가 다시 몸을 돌리고 가버릴까 괜히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케이건은 고개를 푹 숙이곤 들지 못했다. 한참이나 말이 없는 것이 여전히 그녀의 기분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아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정적. 정적. 정적. …진짜 화났나?
 결국 케이건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입으로 손을 틀어막으며 웃음을 겨우 참고 있는 사모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니름을 들을 수 있다면 머리가 깨져라 웃음소리가 들렸을 표정이었다.

 “아, 아, 이 진짜 바보 같은 남자! 어떻게 이렇게 바보 같을 수 있어, 케이건? 너 진짜 바보야?”
 “…세 번이나 말 할 필요는 없잖나.”
 “아니, 넌 열 번이고 백번이고 들어야 해. 바보! 겨우 그런 이유로 옷을 안 입고 있었어? 와, 정말. 넌 정말.”
 “화 풀렸나?”
 “애초에 화 같은 거 안 났거든? 밥 먹기 전에 옷이나 더 사러 가자! 안 닳게 여러 벌 사주면 되는 거지? 자, 얼른 가자!”
 “아까까지 분명히 화 난 표정으로…윽, 잡아당기지 마!”

 깔깔거리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는 신도 들을 정도로 하늘 위로 청명하게 울려퍼지고 허둥거리는 발걸음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도 들여다 볼 정도로 비틀거리고, 둘은 그렇게 길의 끝을 향해 걸어간다. 아마도 영원히, 둘은 그렇게 길을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