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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심화야(ver.2) 5회차

도노 헤세 2016. 9. 5. 18:45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뿐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름조은 自由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밧지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잇너냐.

잇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긔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 시집 「님의 침묵」(회동서관刊.1926년)중에서

주제↑






 “선혜아빠, 좀 일어나 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대.”


 아직 잠결이 덕지덕지 묻어 있던 남편은 그 후로도 한참을 흔들어야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외할머니, 돌아가셨다고. …편히 가셨대?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니까 늙은이 호상이지 뭐. 장례식 가야지. 나 선혜 깨울 테니까 나갈 채비 좀 해요. 남편은 아직 졸린 눈을 손등으로 부비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몸을 일으켜 딸의 방으로 향했다.

 지나치는 걸음에서 문득 남편의 질린 눈빛, 자기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다는데 사람이 눈물 한 방울 없어. 그런 모습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언제 눈을 감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90줄의 늙은이였고, 며느리들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골치 아픈 치매 환자였다. 명절이 되어서 가끔 얼굴을 뵈러 갈 때면 외할머니의 작은 방은 늘 큼큼한 냄새가 났고 모인 가족들은 유산도 얼마 없는 늙은이 더 자식들 고생시키지 말고 얼른 가셔야지, 어차피 들려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 거리낌 없이 그런 말들을 내뱉었던 것이다.

 칭얼거리는 딸을 도닥이며 옷을 입히고 나오자 남편은 막 세수를 했는지 아직 얼굴에 물기가 남아있는 채로 양복을 꺼내고 있었다. 엄마, 나 졸려. 안 가면 안 돼? 다시금 늘어지는 아이를 꼭 붙잡아 주고는 부엌 서랍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아이의 입에 까 주었다. 입으로 들어오는 새콤한 사탕에 아이는 좀 잠이 깼는지 배시시 웃어보였다. 도르륵 도르륵 사탕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남편이 옷을 다 입었는지 나가자며 방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선혜 졸립지? 엄마 무릎 베고 좀 누워있어.”


 아이의 작은 머리가 무릎 위로 묵직하게 올라온다.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자니 어린 눈이 금방 다시 감기고 곧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톡, 뭔가가 아이 입에서 굴러나온다. 반쯤 녹은 사탕이다. 자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뱉었나보다. 자동차 시트가 지저분해지기 전에 얼른 그것을 휴지로 싸서 손에 쥐었다. 아이가 자는 소리에 남편도 별 말이 없고, 침묵이 흐르니 괜히 졸려와 나 또한 잠깐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돌아가셨다는 외할머니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외할머니를 꽤나 따랐던 것 같은데, 어느 정도 머리가 굳고 나니 슬슬 치매끼를 보이시는 외할머니가 싫어 외면했던 것 같다. 아주 못 알아 보셨던 건 아니고 그저 여기가 어딘지 좀 헷갈리시고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하는 정도였는데도 그랬다. 어린 마음이 다 그렇지, 그리 생각하면 별로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잠시 있으니 손바닥이 조금씩 끈적거린다. 사탕이 녹아 손바닥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조금 짜증스러운 심정으로 그것을 휴지로 여러 겹 둘둘 마는데, 언젠가 비슷한 적이 있지 않았나 싶어 생각에 빠진다.


 ‘할머니, 손이 계속 끈적거려.’

 ‘에그. 또 먹던 것 손에 쥐고 있었어? 지저분하게스리. 할미가 새 사탕 줄테니까 이건 버리자. 지지야 지지.’

 ‘더 맛있는 걸로 줄 거야?’

 ‘할미 서랍에 너 좋아하는 거 많다. 지난번에 장 섰을 때 한 움큼씩 사왔지.’


 내가 뭘 좋아했더라,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사탕 이름을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이 다 왔다며 차를 세웠다. 잠든 아이를 깨워 차에서 내리고, 별 생각 없이 손에 쥐고 있던 휴지뭉치를 바닥에 버린 후 외할머니네 집으로 들어갔다. 이 비좁은 집에 평소엔 자전거 한 대나 놓여 있으면 많이 있는 것일 텐데 지금은 여러 차들로 마당이 뒤덮여 있으니 더 좁아보였다. 명절에도 이렇게 많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연다.

 조금씩 곡소리도 나는 듯 하지만 그보다는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가 더 많아 상갓집이라기엔 꽤 이질감이 있었다. 대부분 들리는 소리는 그런 것이다. 여러 사람 속 썩이시더니 이제야 가셨네. 그 별것도 없는 유산은 다 장례식에 쓴다네. 괜히 분쟁도 없고 잘 된 일이지. 평소엔 그렇게 난리난리를 치시더니 갈 때는 편하게 가셨다나봐. 수발 들러 온 며느리가 흔들어보지 않았으면 죽은 줄도 몰랐다는 거야, 글쎄.

 작은 소란의 틈 속에서 오랜만에 보는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며 외할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항상 어둡고 냄새가 났기에 모두가 싫어했던 방이 오늘만큼은 인기다. 


 “선혜엄마 왔네, 오느라 고생했지?”

 “아니에요, 이모. 외할머닌 안에 계세요?”

 “그래. 들어가 볼 거야?”

 “그래야죠. 여보, 잠깐 선혜 좀 맡아줄래.”


 남편이 아이를 안는 것을 보고는 낡은 나무문을 열고 들어갔다. 죽은 이가 있는 방 치고는 상당히 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님들이 많이 오시고 더 이상 몸 약한 늙은이도 없으니 환기를 잘 시켜 놓은 탓일까. 물수건으로 시체를 닦던 며느리와 자식들이 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 또한 같이 인사를 나누며 외할머니의 시체로 향했다.

 참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까 들리던 말처럼 꼭 잠든 것만 같은 얼굴. 외할머니, 하고 부르면 금방 눈을 뜨고 내 새끼 왔나. 하고 대답할 것만 같은데. 그러나 이 나이 먹고 주책맞게 그런 짓이 하고 싶은 건 아니고, 그저 늙은이 조글거리는 손을 몇 번 만지다가 시선을 뗐다. 이정도면 예의는 다 했다 싶었다.


 “그런데 먹지도 않을 걸 왜 그렇게 사다가 놓으라고 한 거람. 어디다 쓰라고.”


 서로 종알거리던 그네들의 말 중에 유난히 귀에 박히는 게 있어서 시선을 보이자 그네들 중 한 명이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말을 이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웬 사탕을 그렇게 사놓으라고 하시대요. 그래서 본인이 드실 건 줄 알고 사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하나도 안 드셨지 뭐에요.”

 “…그거 어디 있어요?”

 “네? 어디다 뒀더라. 아, 저기 서랍 안에 있을 거예요. 늘 거기만 열었다 닫았다 하셨거든.”


 그저 늙은이 주책이려니,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가면 편할 것 같은데 내 손은 어느새 서랍을 향하고 있었다. 작은 서랍을 떨리는 손으로 열어보니 서랍 안을 가득 메운 사탕. 요새 사탕같이 커피 맛, 과일 맛, 이런 것도 아니고 옛날 시장에서나 사탕장수들이 봉투에 담아 팔고 있는 우유맛 사탕. 이빨도 없으셔서 이 찐득거리는 걸 스스로 드실 린 없으니 분명 남 주시려고 사다두신 거다.

 그제야 내가 예전에 어떤 사탕을 그리 좋아했는지 기억이 났다. 외할머니가 늘 본인 허리춤에 두시고 내 손에 한 움큼씩 쥐여 주곤 했던 사탕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제야 기억이 났다.


 ‘할머니 집엔 맨날 이거 있어? 맨날맨날 있어?’

 ‘우리 미란이 언제 올까 생각하면서 항상 사 놓지. 내 새끼 이거 제일 좋아하잖어.’



 누군가 이상해하며 선혜엄마, 하고 내 어깨를 건드리기 전까지, 그 서랍문은 한참 동안 닫히질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