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심화야 4회차
'Self-Actuallization'
내 친구는 소위 말하는 '실패자' 였다. 고등학교 시절 온갖 잡다한 것들에 빠져 있느라 그저 그런 대학에 갔고, 그저 그런 학점과 함께 졸업해서 그저 그런 백수로 부모님의 눈치를 보며 아르바이트만 전전하고 있었다. 같은 대학에 진학했을 땐 그래도 자주 같이 술도 마시고 무박여행도 다니곤 했었는데, 졸업하고 나서는 영 얼굴 볼 기회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은 편의점만 전전하는 동안 나는 바로 취업을 해버렸던 것이다. 요령 있는 놈이 성공한다고, 성적표에 C로 가득했던 녀석과 달리 학점관리와 함께 교수님께 꾸준히 셔츠라도 사드린 덕에 작은 회사에나마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낙하산 신세가 늘 그렇듯 바쁜 일상에 치였기 때문에 더욱 녀석과 만날 기회가 없기도 했다. 그나마 페이스북에 올리는 잡다한 글에 서로 댓글을 나눔으로써 팍팍한 일상 속에서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어느정도 회사 내에서 자리도 잡히고, 지루한 야근 시간에 야식이나 시켜먹을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스마트폰의 알림 앰프가 파란색으로 반짝였다. 또 누가 얼마 전 올린 음식 사진에 댓글을 달았나 싶어 화면을 밀어보는데 의외로 글에 태그가 되었다는 알림이었다. 날 태그할만한 사람이 있던가? 녀석이었다. 사진과 함께 올라온 짧은 게시물에 태그되어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고, 그 글을 읽은 나는 곧바로 상사에게 양해를 구한 후 사무실에서 나가 전화를 걸었다. 금방 글을 올렸으니 핸드폰을 아직 잡고 있을 텐데도 전화음이 좀 흐른 후에야 녀석은 전화를 받았다.
[글 봤냐? 빠르네.]
"너 진심이냐?"
[같이 올린 거 봤잖냐. 너한텐 말해주고 싶더라. 그래도 고등학교때부터 아직까지 연락하는 건 너 하난데.]
"너무 갑작스러워서...아니다, 얼굴 보고 얘기하자. 내일 시간 되냐? 너희 집 근처로 갈게."
[자식, 내 일인데 왜 니가 심각하냐. 그래. 내일 보자.]
전화를 끊고 난 뒤 나는 다시 게시글에 떠 있는 사진을 살펴보았다. 그림이었다. 그 쪽엔 조예가 없는 나였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다 싶은, 잿빛 배경에 얼굴이 보이지 않게 등 돌리고 있는 남자를 그린 그림. 그리고 같이 올라온 짧은 글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나 그림 시작했다. 이쪽 길로 가 보려고.'
오랜만에 만난 녀석의 얼굴은 제법 심각한 빛을 띄고 있었다. 깊어진 눈주름 아래로 그림을 시작했다는 본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옷소매에 묻은 물감얼룩이 눈에 띄었다. 우리는 거의 세 달 만에 만났지만 인사만 간단히 나눈 뒤 바로 근처에 있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치킨과 맥주를 시키고도 할 말이 없어 잠시 침묵만 유지하다 먼저 나온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서야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 어제 되게 놀랐다."
"이해해. 솔직히 나도 내 결정이 놀랍다."
"어떻게 된 거냐? 너 학생 때부터 한 번도 그림에 관심 둔 적 없었잖아. 부모님하고는 얘기 해 봤고?"
마지막 말을 듣고 녀석이 짓는 웃음에 나는 다시 맥주를 넘겼다. 시원해야 할 맥주가 그 웃음이 비쳐서인지 목을 씁쓰름하게 쓸고 지나갔다. 항상 웃고 계시던 녀석의 어머님이 떠올랐다. 내가 취직한 뒤에 찾아갔을 때도, 집에서 놀고 있는 아들 흉을 보면서도 시선만큼은 늘 다정하시던 분이셨다. 아마 그림을 그리겠다는 아들의 당황스러운 선언에도 밀려드는 걱정을 숨기고 격려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녀석은 이제 그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 마음의 빚이라는 걸 아는 나이였다.
애써 튼 대화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가고, 나도 녀석도 말없이 맥주만 마셨다. 갓 튀긴 치킨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술안주였지만 오늘은 둘 다 묵묵히 술잔만 들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곱창집 같은 데 가서 소주나 시킬 걸 그랬나, 잠시 후회를 했다.
벌써 몇 잔째인지 슬슬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잠시 고개를 젖히고 있는데 탁, 하고 테이블에 술잔 내려놓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녀석도 슬슬 맛이 가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빈 맥주잔을 쥐고 있었다. 한 잔 더 마실 거냐고 물어보려는데 늘어진 머리카락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니가 보기에도 나 대책없어 보이냐?"
"솔직히 좀 그렇지 않겠냐. 누구라도. 우리 나이가 벌써 계란 한 판이 다 되가는데..."
"새끼, 말하는 거 하곤. 그래도 나 엄청 고민한거다. 진짜 고민하고 고민해서 결정했다. 이런 대책없어 보이는 결정 하는거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냐."
일 하는 아줌마가 와서 술 더 주냐고 물어봤지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녀석이 먼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줌마가 가고 나자 다시 살짝 혀 꼬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뜬금없는 계기였다. 거울에 비친 이 나이 먹고 아직도 편의점만 전전하는 내가 너무 한심하게 보이는데, 그런데 갑자기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지는 거야. 나도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그려내고 나면 나는 좀 나아질 줄 알았던건지..."
"니가 페이스북에 올린 그림?"
"응. 아직 덜 그렸다. 뭔가 보충하고 보충해도 영 부족해보여서...그거 그릴려고 다른 걸로 연습도 해보고, 이것저것 알아보고 하는데 이게 정말 내 길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너도 그동안 봤다시피 난 지금까지 한번도 진심으로 해 본 적이 없는데, 유독 이것만...그래. 그래서 네 생각이 나더라. 부모님 말고는 네가 나랑 가장 오래 알던 사이니까,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해서."
"......"
"역시 한심해 보이지? 나도 아는데...웃긴건, 그런데도 그만두고 싶진 않다는 거야. 학생때는 다른 놈들이 이러는게 우스워 보였는데 이 나이 먹고 하려니까 그놈들이 대단해 보이네..."
머리가 싸했다. 뭔가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할 말이 없었다. 너무 답이 없어 보였다던가, 한심하다던가 하는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그건 내 뜻이 아닐 것이다. 다만 난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그를 봐 왔던 시간동안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 모습을 돈이라던가 남들 시선이라던가 하는 말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녀석이 원하는 미래가 어떻다는 것보다는 지금 이 모습에 위로를 주고 싶었다. 그것을 이해했을까, 조금은 민망하게 웃으며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술기운에 양 볼이 붉었다. 그리고 그 볼보다 녀석이 더 붉었다. 우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계산을 하고 호프집에서 나왔다. 아직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치킨을 서로에게 건네 주며 택시를 잡았다. 차를 타고 돌아가는 내 뒤로 녀석은 오래오래 손을 흔들고 있었다.
며칠 뒤 페이스북에다 화실에 다니게 되었다고 올린 녀석의 글에는 지난번에 보여주었던 그림이 수정되어 올라와 있었다. 여전히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붉을 것만 같은 뒷모습에, 잿빛 배경이 맑은 하늘색으로 바뀌어 있는 완성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