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뿐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름조은 自由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밧지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잇너냐.

잇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긔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 시집 「님의 침묵」(회동서관刊.1926년)중에서

주제↑






 “선혜아빠, 좀 일어나 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대.”


 아직 잠결이 덕지덕지 묻어 있던 남편은 그 후로도 한참을 흔들어야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외할머니, 돌아가셨다고. …편히 가셨대?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니까 늙은이 호상이지 뭐. 장례식 가야지. 나 선혜 깨울 테니까 나갈 채비 좀 해요. 남편은 아직 졸린 눈을 손등으로 부비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몸을 일으켜 딸의 방으로 향했다.

 지나치는 걸음에서 문득 남편의 질린 눈빛, 자기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다는데 사람이 눈물 한 방울 없어. 그런 모습이 느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언제 눈을 감아도 이상할 것이 없는 90줄의 늙은이였고, 며느리들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골치 아픈 치매 환자였다. 명절이 되어서 가끔 얼굴을 뵈러 갈 때면 외할머니의 작은 방은 늘 큼큼한 냄새가 났고 모인 가족들은 유산도 얼마 없는 늙은이 더 자식들 고생시키지 말고 얼른 가셔야지, 어차피 들려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 거리낌 없이 그런 말들을 내뱉었던 것이다.

 칭얼거리는 딸을 도닥이며 옷을 입히고 나오자 남편은 막 세수를 했는지 아직 얼굴에 물기가 남아있는 채로 양복을 꺼내고 있었다. 엄마, 나 졸려. 안 가면 안 돼? 다시금 늘어지는 아이를 꼭 붙잡아 주고는 부엌 서랍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아이의 입에 까 주었다. 입으로 들어오는 새콤한 사탕에 아이는 좀 잠이 깼는지 배시시 웃어보였다. 도르륵 도르륵 사탕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남편이 옷을 다 입었는지 나가자며 방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외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선혜 졸립지? 엄마 무릎 베고 좀 누워있어.”


 아이의 작은 머리가 무릎 위로 묵직하게 올라온다.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자니 어린 눈이 금방 다시 감기고 곧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톡, 뭔가가 아이 입에서 굴러나온다. 반쯤 녹은 사탕이다. 자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뱉었나보다. 자동차 시트가 지저분해지기 전에 얼른 그것을 휴지로 싸서 손에 쥐었다. 아이가 자는 소리에 남편도 별 말이 없고, 침묵이 흐르니 괜히 졸려와 나 또한 잠깐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대신 돌아가셨다는 외할머니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외할머니를 꽤나 따랐던 것 같은데, 어느 정도 머리가 굳고 나니 슬슬 치매끼를 보이시는 외할머니가 싫어 외면했던 것 같다. 아주 못 알아 보셨던 건 아니고 그저 여기가 어딘지 좀 헷갈리시고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하는 정도였는데도 그랬다. 어린 마음이 다 그렇지, 그리 생각하면 별로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잠시 있으니 손바닥이 조금씩 끈적거린다. 사탕이 녹아 손바닥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조금 짜증스러운 심정으로 그것을 휴지로 여러 겹 둘둘 마는데, 언젠가 비슷한 적이 있지 않았나 싶어 생각에 빠진다.


 ‘할머니, 손이 계속 끈적거려.’

 ‘에그. 또 먹던 것 손에 쥐고 있었어? 지저분하게스리. 할미가 새 사탕 줄테니까 이건 버리자. 지지야 지지.’

 ‘더 맛있는 걸로 줄 거야?’

 ‘할미 서랍에 너 좋아하는 거 많다. 지난번에 장 섰을 때 한 움큼씩 사왔지.’


 내가 뭘 좋아했더라,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사탕 이름을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이 다 왔다며 차를 세웠다. 잠든 아이를 깨워 차에서 내리고, 별 생각 없이 손에 쥐고 있던 휴지뭉치를 바닥에 버린 후 외할머니네 집으로 들어갔다. 이 비좁은 집에 평소엔 자전거 한 대나 놓여 있으면 많이 있는 것일 텐데 지금은 여러 차들로 마당이 뒤덮여 있으니 더 좁아보였다. 명절에도 이렇게 많진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연다.

 조금씩 곡소리도 나는 듯 하지만 그보다는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가 더 많아 상갓집이라기엔 꽤 이질감이 있었다. 대부분 들리는 소리는 그런 것이다. 여러 사람 속 썩이시더니 이제야 가셨네. 그 별것도 없는 유산은 다 장례식에 쓴다네. 괜히 분쟁도 없고 잘 된 일이지. 평소엔 그렇게 난리난리를 치시더니 갈 때는 편하게 가셨다나봐. 수발 들러 온 며느리가 흔들어보지 않았으면 죽은 줄도 몰랐다는 거야, 글쎄.

 작은 소란의 틈 속에서 오랜만에 보는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며 외할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항상 어둡고 냄새가 났기에 모두가 싫어했던 방이 오늘만큼은 인기다. 


 “선혜엄마 왔네, 오느라 고생했지?”

 “아니에요, 이모. 외할머닌 안에 계세요?”

 “그래. 들어가 볼 거야?”

 “그래야죠. 여보, 잠깐 선혜 좀 맡아줄래.”


 남편이 아이를 안는 것을 보고는 낡은 나무문을 열고 들어갔다. 죽은 이가 있는 방 치고는 상당히 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님들이 많이 오시고 더 이상 몸 약한 늙은이도 없으니 환기를 잘 시켜 놓은 탓일까. 물수건으로 시체를 닦던 며느리와 자식들이 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 또한 같이 인사를 나누며 외할머니의 시체로 향했다.

 참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까 들리던 말처럼 꼭 잠든 것만 같은 얼굴. 외할머니, 하고 부르면 금방 눈을 뜨고 내 새끼 왔나. 하고 대답할 것만 같은데. 그러나 이 나이 먹고 주책맞게 그런 짓이 하고 싶은 건 아니고, 그저 늙은이 조글거리는 손을 몇 번 만지다가 시선을 뗐다. 이정도면 예의는 다 했다 싶었다.


 “그런데 먹지도 않을 걸 왜 그렇게 사다가 놓으라고 한 거람. 어디다 쓰라고.”


 서로 종알거리던 그네들의 말 중에 유난히 귀에 박히는 게 있어서 시선을 보이자 그네들 중 한 명이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말을 이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웬 사탕을 그렇게 사놓으라고 하시대요. 그래서 본인이 드실 건 줄 알고 사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하나도 안 드셨지 뭐에요.”

 “…그거 어디 있어요?”

 “네? 어디다 뒀더라. 아, 저기 서랍 안에 있을 거예요. 늘 거기만 열었다 닫았다 하셨거든.”


 그저 늙은이 주책이려니,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가면 편할 것 같은데 내 손은 어느새 서랍을 향하고 있었다. 작은 서랍을 떨리는 손으로 열어보니 서랍 안을 가득 메운 사탕. 요새 사탕같이 커피 맛, 과일 맛, 이런 것도 아니고 옛날 시장에서나 사탕장수들이 봉투에 담아 팔고 있는 우유맛 사탕. 이빨도 없으셔서 이 찐득거리는 걸 스스로 드실 린 없으니 분명 남 주시려고 사다두신 거다.

 그제야 내가 예전에 어떤 사탕을 그리 좋아했는지 기억이 났다. 외할머니가 늘 본인 허리춤에 두시고 내 손에 한 움큼씩 쥐여 주곤 했던 사탕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제야 기억이 났다.


 ‘할머니 집엔 맨날 이거 있어? 맨날맨날 있어?’

 ‘우리 미란이 언제 올까 생각하면서 항상 사 놓지. 내 새끼 이거 제일 좋아하잖어.’



 누군가 이상해하며 선혜엄마, 하고 내 어깨를 건드리기 전까지, 그 서랍문은 한참 동안 닫히질 못하고 있었다.  


Posted by 도노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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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건, 이리 와 봐.”

 아라짓 대학교의 하루는 늘 그렇듯 맑고 푸르다. 자신을 부르는 미성의 목소리에 케이건은 주섬주섬 챙기던 책들을 뒤로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를 뒤로 숨긴 사모는 그의 의아한 표정에 싱긋 웃으며 손을 까딱였다. 뭐지? 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가 인적이 드문 강의실 뒤편으로 케이건은 걸어갔다. 사모의 앞이었다.

 “왜?”
 “줄 거 있어. 더 가까이 와 봐. 남들이 보잖아.”
 “…과제라도 몰래 보여주려고?”
 “하여간 생각하는 것 하고는.”

 그게 아니라면 뭔가. 도통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케이건은 한 발짝 더 사모에게 다가갔다. 손이 닿을 정도로 다가오자 사모가 그의 팔을 확 끌어당겨 몸을 밀착한 뒤 뒤에 숨겼던 것을 그의 품 안에 안겼다. 어어, 눈 깜짝할 새에 제 품에 담긴 종이봉투를 보고는 케이건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선물,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가까이 울렸다.
 선물? 케이건은 무심히 종이봉투를 뜯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이런 멋대가리 없는 남자, 하고 사모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민망함보단 궁금함이 더 컸다. 부시럭 소리와 함께 종이봉투가 뜯겨나가고 안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옷이군.”
 “뭐야, 감상평은 고작 그게 끝?”
 “갈색이고 따뜻해 보이는 옷.”
 “아. 케이건. 넌 정말이지, 정말 멋이라고는 1만큼도 없는 남자야.”

 사모가 한탄하는 소리에도 케이건은 그런가, 하고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품 안에 놓여 진 갈색 스웨터가 아직 사모의 온기를 먹은 탓인지 따뜻했다. 평소에 옷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 아무거나 입는 케이건이었지만 어쩐지 이 스웨터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골라준 옷이라 그런 걸까?
 툭, 사모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 케이건이 멀뚱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사모는 아까의 한탄하던 표정을 버리곤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감상평이 끝났으니 이젠 무슨 말을 해야하지?”
 “…고마워.”
 “맞았어! 이럴 땐 그렇게 멍청한 남자는 아닌데.”
 “바보 취급 하지 마라.”
 “바보잖아. 선물을 받고도 고맙다는 말도 못하는 바보.”

 바보, 나 다음 강의 있어서 먼저 가야돼. 옷 잘 입어! 짐을 챙겨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사모의 뒷모습을 케이건은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바보 취급을 당하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품에 안긴 스웨터가 맘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그 자리에 있던 케이건은 이윽고 자신의 다음 강의가 벌써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곤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케이건이 그 옷을 입는 날은 오지 않았다.


 -
 거의 수백 합을 두고 나서야 그날의 대련이 끝이 났다. 사모와 케이건은 달아오른 숨을 헉헉거리며 목검을 내려놨다. 후배들이 건네주는 음료수를 따며 둘은 다음 대련 시합이 벌어지는 강당 중앙에서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이온음료가 마치 탄산이라도 들어간 양 찌르르하게 목젖을 울렸다. 절로 크으, 소리를 내며 케이건은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사모도 마찬가지라 똑같이 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모가 깔깔 웃음을 터트리는 이유를 케이건은 몰랐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오늘도 대단했어, 케이건. 하마터면 밀릴 뻔했다고.”
 “밀리지도 않았잖아. 나야말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았으면 당했었을 것 같군.”
 “우리 대련은 정신 싸움이야.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방심하는 사람이 지는 거야.”
 “틀린 말은 아니야.”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래? 그녀의 말에 케이건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 후에 함께 밥을 먹으러 가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뒤에선 그런 둘을 보며 사귀는 거 아니냐는 쑥덕임이 나오고 있지만 사모와 케이건 둘 다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씻으러 남자 전용 욕실로 들어가며 케이건은 땀에 절은 도복을 벗어던졌다. 탄탄하게 근육이 배긴 몸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고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끈적끈적했던 몸이 물을 맞아 상쾌함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술을 마실까. 내일 과제가 있긴 한데, 사모한테 보여 달라고 하면 되겠지. 태평하게 부정을 저지를 계획을 세우며 케이건은 몸을 닦고는 수건으로 물에 젖은 머리를 털어낸 뒤 집에서 입고 왔던 옷을 껴입었다. 늘 입고 다니는 허름한 티셔츠에 청바지 그대로였다. 심지어 목조차 늘어나 사모가 매일 그것 좀 버리라고 잔소리를 했던 옷이다. 하지만 편한 걸 어쩌리오.
 말끔하게 닦고는 밖에 나가니 아직 사모는 벌써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나가였지. 케이건이 나가들에게 부러운 점은 인간처럼 신경을 써서 씻고 말리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인간은 너무 해야 할 것이 많다. 물로 씻고, 수건으로 말리고, 그러고 나면 또 머리를 말리고. 물론 그는 머리가 덜 마른 채로 밖에 나와 좀 부석해지는 것 따윈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아, 나왔어? 반갑게 고개를 돌린 사모는 케이건의 모습을 보고는 팩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갑작스럽게 식는 분위기에 케이건이 당황해서 그녀를 내려 보자 사모는 오랫동안 참았다는 듯 하이 톤의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케이건.”
 “…응?”
 “왜 내가 사준 옷 안 입어? 언제까지 그런 허름한 거 입고 다닐 거야?”

 어, 그러니까, 그 옷 때문에…? 케이건이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사모는 홱 몸을 돌렸다. 그리곤 한 마디 인사도 없이 타박타박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아, 안돼. 내 내일 과제가! 케이건은 급히 그녀를 따라가 팔을 잡았다. 잔뜩 째진 눈이 그를 향했다. 분명 아까까지 씻고 나왔는데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이 서늘했다.

 “왜? 사줬는데도 버려두고 남의 성의 무시하는 사람하고는 할 말 없어!”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사준 옷 입고 나온 적 없지? 왜인데? 말해 봐!”
 “그게….”

 케이건은 어쩐지 귀가 빨개진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싫어서 그런게 아니고. 그 이유는….

 “…사모. 네가 사준 옷인데, 닳을까봐.”

 잠깐의 정적.
 혹여나 그녀가 다시 몸을 돌리고 가버릴까 괜히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케이건은 고개를 푹 숙이곤 들지 못했다. 한참이나 말이 없는 것이 여전히 그녀의 기분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아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정적. 정적. 정적. …진짜 화났나?
 결국 케이건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입으로 손을 틀어막으며 웃음을 겨우 참고 있는 사모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니름을 들을 수 있다면 머리가 깨져라 웃음소리가 들렸을 표정이었다.

 “아, 아, 이 진짜 바보 같은 남자! 어떻게 이렇게 바보 같을 수 있어, 케이건? 너 진짜 바보야?”
 “…세 번이나 말 할 필요는 없잖나.”
 “아니, 넌 열 번이고 백번이고 들어야 해. 바보! 겨우 그런 이유로 옷을 안 입고 있었어? 와, 정말. 넌 정말.”
 “화 풀렸나?”
 “애초에 화 같은 거 안 났거든? 밥 먹기 전에 옷이나 더 사러 가자! 안 닳게 여러 벌 사주면 되는 거지? 자, 얼른 가자!”
 “아까까지 분명히 화 난 표정으로…윽, 잡아당기지 마!”

 깔깔거리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는 신도 들을 정도로 하늘 위로 청명하게 울려퍼지고 허둥거리는 발걸음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도 들여다 볼 정도로 비틀거리고, 둘은 그렇게 길의 끝을 향해 걸어간다. 아마도 영원히, 둘은 그렇게 길을 걸어갈 것이다. 


Posted by 도노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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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 페이는 오늘도 칼날을 기다리며 잠에 든다. 밤은 그녀에게 독을 뒤집어쓰게 하는 시간이다. 유일하게 가면을 벗고 대호왕이 아닌 사모 페이가 될 수 있는 시간, 맹세를 받는 이가 아닌 사냥감이 되는 시간. 사모 페이는 자신을 물어뜯을 키탈저 사냥꾼을 기다린다.
터벅, 터벅. 숨죽인 발자국 소리를 사모 페이는 듣는다. 그리고 그 소리에도 불구하고 사모 페이는 깨지 않는다. 그녀는 사냥꾼의 비위를 충분히 맞춰줄 의향이다. 얌전하게, 목이 비틀어지는 사냥감. 그렇게 자신의 사냥꾼에게 숨이 끊길 수만 있다면 완벽한 밤이 될 텐데. 어리석게도 사냥꾼을 사랑해버린 사냥감은 얌전히 목을 내어주는 것 말고는 그에게 사랑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것도 사랑이라면, 케이건. 네가 영원히 키탈저 사냥꾼으로 남는다면 내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그저 기뻐할 수 있겠지.
침대가 덜컹인다. 그 모든 움직임에 이미 다른 사냥감들이라면 쪼르르 도망갔어야 옳겠지만 가장 예민한 사냥감인 사모 페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 나를 봐. 비늘에 뒤덮힌 나가의 모습을 봐. 나의 키탈저 사냥꾼아, 너는 내 목을 전리품처럼 들고 기세 당당히 돌아가야 할 의무가 있어.

툭, 액체와 같은 것이 감은 얼굴 위로 떨어진다.
투둑, 그보다 무겁고 진득한 것이 다시금 얼굴로 떨어진다.
더이상 참을 수 없어 사모페이는 눈을 뜬다.

"사모..."

그녀의 사냥꾼이 보인다. 제 손바닥에 단검을 박아 넣고는 젖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유일한 키탈저 사냥꾼. 그의 눈과 손에서 떨어지는 두 액체가 함께 섞여 비늘 돋은 얼굴을 적신다.
결국 우리는 실패자다. 사모 페이는 사냥감이 되는 데에 실패했고, 케이건 드라카는 키탈저 사냥꾼이 되는 데에 실패했다. 우리는 끝맺어질 수 없다. 끝은 다가오지 않는다. 영원히 애증 뿐이라.
허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가면을 쓰지 않았는데도 육성으로 웃음이 나온다. 정신적으로는 그가 못듣는 비명을 지르며, 사모페이는 웃는다. 제 사냥꾼을 끌어안으며 웃는다.
죽지 못하면 웃자꾸나,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제 빈 가슴을 상대의 박동소리로 달구며. 정신이 멀도록 비명을 질러대며 사모 페이의 웃음소리는 멎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의 끝이 다가올 때까지 계속 될 웃음이 침대 위를 적시다 못해 땅바닥 아래로 긴다. 스물거리며 기어가는 사냥꾼과 사냥감의 시간이 애처롭다.


Posted by 도노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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