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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건, 이리 와 봐.”

 아라짓 대학교의 하루는 늘 그렇듯 맑고 푸르다. 자신을 부르는 미성의 목소리에 케이건은 주섬주섬 챙기던 책들을 뒤로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를 뒤로 숨긴 사모는 그의 의아한 표정에 싱긋 웃으며 손을 까딱였다. 뭐지? 학생들이 거의 빠져나가 인적이 드문 강의실 뒤편으로 케이건은 걸어갔다. 사모의 앞이었다.

 “왜?”
 “줄 거 있어. 더 가까이 와 봐. 남들이 보잖아.”
 “…과제라도 몰래 보여주려고?”
 “하여간 생각하는 것 하고는.”

 그게 아니라면 뭔가. 도통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케이건은 한 발짝 더 사모에게 다가갔다. 손이 닿을 정도로 다가오자 사모가 그의 팔을 확 끌어당겨 몸을 밀착한 뒤 뒤에 숨겼던 것을 그의 품 안에 안겼다. 어어, 눈 깜짝할 새에 제 품에 담긴 종이봉투를 보고는 케이건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선물,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가까이 울렸다.
 선물? 케이건은 무심히 종이봉투를 뜯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이런 멋대가리 없는 남자, 하고 사모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민망함보단 궁금함이 더 컸다. 부시럭 소리와 함께 종이봉투가 뜯겨나가고 안에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옷이군.”
 “뭐야, 감상평은 고작 그게 끝?”
 “갈색이고 따뜻해 보이는 옷.”
 “아. 케이건. 넌 정말이지, 정말 멋이라고는 1만큼도 없는 남자야.”

 사모가 한탄하는 소리에도 케이건은 그런가, 하고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품 안에 놓여 진 갈색 스웨터가 아직 사모의 온기를 먹은 탓인지 따뜻했다. 평소에 옷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 아무거나 입는 케이건이었지만 어쩐지 이 스웨터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골라준 옷이라 그런 걸까?
 툭, 사모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가볍게 쳤다. 케이건이 멀뚱한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사모는 아까의 한탄하던 표정을 버리곤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감상평이 끝났으니 이젠 무슨 말을 해야하지?”
 “…고마워.”
 “맞았어! 이럴 땐 그렇게 멍청한 남자는 아닌데.”
 “바보 취급 하지 마라.”
 “바보잖아. 선물을 받고도 고맙다는 말도 못하는 바보.”

 바보, 나 다음 강의 있어서 먼저 가야돼. 옷 잘 입어! 짐을 챙겨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사모의 뒷모습을 케이건은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바보 취급을 당하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품에 안긴 스웨터가 맘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그 자리에 있던 케이건은 이윽고 자신의 다음 강의가 벌써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곤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케이건이 그 옷을 입는 날은 오지 않았다.


 -
 거의 수백 합을 두고 나서야 그날의 대련이 끝이 났다. 사모와 케이건은 달아오른 숨을 헉헉거리며 목검을 내려놨다. 후배들이 건네주는 음료수를 따며 둘은 다음 대련 시합이 벌어지는 강당 중앙에서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이온음료가 마치 탄산이라도 들어간 양 찌르르하게 목젖을 울렸다. 절로 크으, 소리를 내며 케이건은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사모도 마찬가지라 똑같이 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모가 깔깔 웃음을 터트리는 이유를 케이건은 몰랐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오늘도 대단했어, 케이건. 하마터면 밀릴 뻔했다고.”
 “밀리지도 않았잖아. 나야말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았으면 당했었을 것 같군.”
 “우리 대련은 정신 싸움이야. 서로가 서로의 움직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방심하는 사람이 지는 거야.”
 “틀린 말은 아니야.”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갈래? 그녀의 말에 케이건은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 후에 함께 밥을 먹으러 가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뒤에선 그런 둘을 보며 사귀는 거 아니냐는 쑥덕임이 나오고 있지만 사모와 케이건 둘 다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씻으러 남자 전용 욕실로 들어가며 케이건은 땀에 절은 도복을 벗어던졌다. 탄탄하게 근육이 배긴 몸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고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끈적끈적했던 몸이 물을 맞아 상쾌함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술을 마실까. 내일 과제가 있긴 한데, 사모한테 보여 달라고 하면 되겠지. 태평하게 부정을 저지를 계획을 세우며 케이건은 몸을 닦고는 수건으로 물에 젖은 머리를 털어낸 뒤 집에서 입고 왔던 옷을 껴입었다. 늘 입고 다니는 허름한 티셔츠에 청바지 그대로였다. 심지어 목조차 늘어나 사모가 매일 그것 좀 버리라고 잔소리를 했던 옷이다. 하지만 편한 걸 어쩌리오.
 말끔하게 닦고는 밖에 나가니 아직 사모는 벌써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나가였지. 케이건이 나가들에게 부러운 점은 인간처럼 신경을 써서 씻고 말리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인간은 너무 해야 할 것이 많다. 물로 씻고, 수건으로 말리고, 그러고 나면 또 머리를 말리고. 물론 그는 머리가 덜 마른 채로 밖에 나와 좀 부석해지는 것 따윈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아, 나왔어? 반갑게 고개를 돌린 사모는 케이건의 모습을 보고는 팩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갑작스럽게 식는 분위기에 케이건이 당황해서 그녀를 내려 보자 사모는 오랫동안 참았다는 듯 하이 톤의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케이건.”
 “…응?”
 “왜 내가 사준 옷 안 입어? 언제까지 그런 허름한 거 입고 다닐 거야?”

 어, 그러니까, 그 옷 때문에…? 케이건이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사모는 홱 몸을 돌렸다. 그리곤 한 마디 인사도 없이 타박타박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아, 안돼. 내 내일 과제가! 케이건은 급히 그녀를 따라가 팔을 잡았다. 잔뜩 째진 눈이 그를 향했다. 분명 아까까지 씻고 나왔는데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이 서늘했다.

 “왜? 사줬는데도 버려두고 남의 성의 무시하는 사람하고는 할 말 없어!”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뭔데?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사준 옷 입고 나온 적 없지? 왜인데? 말해 봐!”
 “그게….”

 케이건은 어쩐지 귀가 빨개진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싫어서 그런게 아니고. 그 이유는….

 “…사모. 네가 사준 옷인데, 닳을까봐.”

 잠깐의 정적.
 혹여나 그녀가 다시 몸을 돌리고 가버릴까 괜히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케이건은 고개를 푹 숙이곤 들지 못했다. 한참이나 말이 없는 것이 여전히 그녀의 기분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아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정적. 정적. 정적. …진짜 화났나?
 결국 케이건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입으로 손을 틀어막으며 웃음을 겨우 참고 있는 사모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니름을 들을 수 있다면 머리가 깨져라 웃음소리가 들렸을 표정이었다.

 “아, 아, 이 진짜 바보 같은 남자! 어떻게 이렇게 바보 같을 수 있어, 케이건? 너 진짜 바보야?”
 “…세 번이나 말 할 필요는 없잖나.”
 “아니, 넌 열 번이고 백번이고 들어야 해. 바보! 겨우 그런 이유로 옷을 안 입고 있었어? 와, 정말. 넌 정말.”
 “화 풀렸나?”
 “애초에 화 같은 거 안 났거든? 밥 먹기 전에 옷이나 더 사러 가자! 안 닳게 여러 벌 사주면 되는 거지? 자, 얼른 가자!”
 “아까까지 분명히 화 난 표정으로…윽, 잡아당기지 마!”

 깔깔거리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는 신도 들을 정도로 하늘 위로 청명하게 울려퍼지고 허둥거리는 발걸음은 모든 이보다 낮은 여신도 들여다 볼 정도로 비틀거리고, 둘은 그렇게 길의 끝을 향해 걸어간다. 아마도 영원히, 둘은 그렇게 길을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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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 페이는 오늘도 칼날을 기다리며 잠에 든다. 밤은 그녀에게 독을 뒤집어쓰게 하는 시간이다. 유일하게 가면을 벗고 대호왕이 아닌 사모 페이가 될 수 있는 시간, 맹세를 받는 이가 아닌 사냥감이 되는 시간. 사모 페이는 자신을 물어뜯을 키탈저 사냥꾼을 기다린다.
터벅, 터벅. 숨죽인 발자국 소리를 사모 페이는 듣는다. 그리고 그 소리에도 불구하고 사모 페이는 깨지 않는다. 그녀는 사냥꾼의 비위를 충분히 맞춰줄 의향이다. 얌전하게, 목이 비틀어지는 사냥감. 그렇게 자신의 사냥꾼에게 숨이 끊길 수만 있다면 완벽한 밤이 될 텐데. 어리석게도 사냥꾼을 사랑해버린 사냥감은 얌전히 목을 내어주는 것 말고는 그에게 사랑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것도 사랑이라면, 케이건. 네가 영원히 키탈저 사냥꾼으로 남는다면 내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그저 기뻐할 수 있겠지.
침대가 덜컹인다. 그 모든 움직임에 이미 다른 사냥감들이라면 쪼르르 도망갔어야 옳겠지만 가장 예민한 사냥감인 사모 페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 나를 봐. 비늘에 뒤덮힌 나가의 모습을 봐. 나의 키탈저 사냥꾼아, 너는 내 목을 전리품처럼 들고 기세 당당히 돌아가야 할 의무가 있어.

툭, 액체와 같은 것이 감은 얼굴 위로 떨어진다.
투둑, 그보다 무겁고 진득한 것이 다시금 얼굴로 떨어진다.
더이상 참을 수 없어 사모페이는 눈을 뜬다.

"사모..."

그녀의 사냥꾼이 보인다. 제 손바닥에 단검을 박아 넣고는 젖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유일한 키탈저 사냥꾼. 그의 눈과 손에서 떨어지는 두 액체가 함께 섞여 비늘 돋은 얼굴을 적신다.
결국 우리는 실패자다. 사모 페이는 사냥감이 되는 데에 실패했고, 케이건 드라카는 키탈저 사냥꾼이 되는 데에 실패했다. 우리는 끝맺어질 수 없다. 끝은 다가오지 않는다. 영원히 애증 뿐이라.
허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가면을 쓰지 않았는데도 육성으로 웃음이 나온다. 정신적으로는 그가 못듣는 비명을 지르며, 사모페이는 웃는다. 제 사냥꾼을 끌어안으며 웃는다.
죽지 못하면 웃자꾸나,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제 빈 가슴을 상대의 박동소리로 달구며. 정신이 멀도록 비명을 질러대며 사모 페이의 웃음소리는 멎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의 끝이 다가올 때까지 계속 될 웃음이 침대 위를 적시다 못해 땅바닥 아래로 긴다. 스물거리며 기어가는 사냥꾼과 사냥감의 시간이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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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텐그라쥬.
 키보렌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담고 있던 땅, 가장 많은 이들이 애정 했던 땅, 가장 영광스러웠으며 가장 많은 햇빛을 받았던 땅.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오지 않는 땅.
 더 이상 손을 대는 이가 없어 불규칙하게 자라있는 나무들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숲 사이로 유난히 돋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이 주위로는 어떤 나무도 풀도 자라지 않고 유일하게 고요함을 표현하는 듯한, 그리고 무게를 지키고 있는 나무. 우리는 그 나무의 이름을 아스화리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나무를 손에 댈 수 없다. 가장 거대한 레콘도 날려버리는 대선풍이 아스화리탈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스화리탈 안에 있는 뇌룡공(雷龍公)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제 3차 대확장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기 위해 몸을 바쳐 투신한 뇌룡공을 모두가 기억할 수 있도록, 또 그 누구도 건들 수 없도록 아스화리탈은 자신의 몸을 굳히고 폭풍을 끌어들여 이 자리에 있었다.

 그 안으로, 한 사나이가 낯익은 발자국을 찍어낸다.
 영원히 영광으로 남을 하텐그라쥬는 그 발자국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무수한 이가 짓밟고 갔지만 하텐그라쥬는 어느 누구의 발자국도 잊지 않는다. 잔뜩 쌓인 낙엽과 석장이들 위를 밟고 오는 무게를 하텐그라쥬는 분명히 알아차렸다. 선바람이 분다. 바람이 이 낯익지만 새로운 여행자를 맞을 준비를 한다.
 당신은 누구?

 사나이는 머리 위로 푹 눌러쓰던 후드를 뒤로 넘긴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후드에 눌려 이마에 흐트러져 있었다. 대충 그것을 정리하고는 사나이는 고개를 치켜든다. 적당하게 탄 피부, 단단한 턱선, 후드를 입었음에도 그 덩치가 드러나는 떡 벌어진 어깨가 사나이의 풍채를 보여준다.
 그리고 하텐그라쥬는 다른 것 또한 본다. 사나이의 주변으로 흐르고 있는 잔바람의 기류를. 그리고 사나이의 어깨에 얹혀져있는 무수한 세월의 깊이를. 그것은 하텐그라쥬와 같거나, 혹은 더 예전의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화석인 사나이가 숨을 들이킨다.
 그리고, 크게 내뱉어-

 “사모 페이!”

 몇 년간의 침묵을 모조리 부수려는 듯 사나이의 목소리는 깊고도 우렁차다.

 “사모 페이, 그대의 맹약자가 왔어. 그대에게 무릎 꿇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자가 널 찾아왔다!”

 여행의 마지막 자리에서, 사내는 한참이고 대답 없는 하텐그라쥬를 둘러본다. 자신이 기다리는 유일한 주군을 향해. 그러나 그가 기다리는 이는 나타나지 않고 맴도는 것은 가끔 떨어지는 낙엽뿐이라, 그리도 단단해 보이던 사나이의 다리가 푹 무너진다.
 우렁차던 목소리가 점차 먹혀들어간다.

 “제발, 이곳에서는 모습을 보여. 사모.”

 무언가에 잠기듯 먹혀들어가던 목소리는 점차 큭큭이는 숨소리로 바뀌고 바람은 매몰차게 사나이의 머릿결을 살랑일 뿐이다. 그것이 손길인 양 별안간 고개를 흔들다가도 아무도 없는 주위에 실망하며 사나이는 이를 꽉 깨문다. 키탈저 사냥꾼의 맹세를 한 자는 눈물조차 허락 없이 흘릴 수 없기에, 감히 그것을 거스를 수 없는 자이기에 이빨을 부서져라 악무는 것으로 눈물을 삼켜낸다.
 그리고, 하텐그라쥬는 새로운 아스화리탈을 맞는다. 움직이지 않는 사내의 위로 낙엽과 먼지들이 소복히 쌓여간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사내는 눈조차 깜박하지 않은 채, 겨우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가끔 가슴만을 들썩이며 자리를 지켰다. 사내의 머리는 이미 낙엽들이 잔뜩 쌓여있고 어느새 외부의 냄새는 사라져 숲의 향기만이 사내의 몸 곳곳에 배어 있을 뿐이다. 그대로 숲에게 먹힐 듯, 숲을 먹을 듯. 아스화리탈만이 유일한 기둥이었던 하텐그라쥬에 새로운 기둥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기둥은 나무가 아니다. 고기를 뜯고 물을 삼키며 연명해야 하는 한낮 인간에 불과하다. 인간이 무정히 버틸 수 있는 시간을 훌쩍 넘긴 사나이의 몸이 점차 기우뚱해진다. 며칠간이나 뜨고 있던 눈이 깜박이고, 단단한 몸이 만지면 패일 듯 스러져간다.
 그리고, 쓰러진다.

 탁.

 “멍청한 인간.”
 “…사모 페이.”
 “멍청한, 이 멍청한. 케이건 드라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인간 같으니.”
 “사모 페이, 내 주인.”
 “그래. …네 주인이 여기 있어, 케이건.”

 하텐그라쥬가 되려던 여자가 있었다. 아스화리탈과 뇌룡공의 곁에서 자신의 일부분을 더해 단단한 기둥이 되려던 여자였다. 속세의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쳐 나와 유일히 아무 것도 저에게 바라지 않는 동생의 곁으로 여자는 도달할 수 있었다. 억지로 끊어낸 것들을 매일 생각하면서, 시간을 쌓아 그것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수족마저 잘라내진 못했음이라. 그녀가 떼어내려 했던 것은 한낱 장신구나 옷가지 따위가 아닌, 신체의 일부였다.
 그리고 그 일부가 지금 찾아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다.

 “눈이 감겨. 사모. 떠나지 말아, 제발.”
 “내가 떠나도 너는 기어코 찾아오겠지. 떠나지 않을게, 케이건. 다시는 나의 용의 수호에서 도망치는 일 따위 없을 것이다.”
 “다시는.”
 “다시는.”

 잠시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좋아져 있을 거야. 속삭이는 미성을 들으며 주인을 찾은 용은 곤한 잠에 빠져든다. 찰나의 꿈을 꾸고 깨어났을 땐 그녀의 말처럼 모든 것이 좋아져 있길 바라며,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을 날을 기다리며. 그는 그동안 악몽으로만 가득했던 꿈으로 스스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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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겨진 가면의 공허한 눈 속이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듯 하여 케이건은 가던 걸음을 멈칫 세웠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익숙하지만 그 상대가 침묵일 때에는 절로 숨을 삼키게 되기 마련이라. 그 깊이를 감히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침묵이 세월을 이기진 못한다. 양 어깨에 역사를 짊어지고 다니는 사내는 가벼이 고개를 돌리고 제 목적을 향해 걸어갔다.
 수수한 흰 침대 위에 검은 물체가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유난히 왜소해 보여 원래 저랬던가, 케이건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의 남자보다도 든든하게 느껴졌던 몸과는 영 딴판으로 어린아이마냥 흔들리는 듯 했다. 친한 이였다면 끌어안아주고 싶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케이건의 눈에는 그저 사냥감일 뿐이다. 그가 침대의 가장자리로 다가가자 검은 물체는 뒤척 몸을 돌렸다. 그 움직임 탓에 흑사자 모피가 살짝 흘러내려와 얼굴을 보이게 했다. 비늘이 돋은 얼굴이 색색 숨을 쉬며 잠들어 있었다.
 가면을 쓰고 왕이었던 이 여자는 가면을 벗고 그의 사냥감이 된다. 아라짓 전사였던 자신도 키탈저 사냥꾼이 되어 사냥감의 목을 비틀기 위해 잠든 이의 위로 올라탄다. 얼마나 조심스럽고도 능숙한 움직임이었냐면 바로 위에 거대한 사내가 올라탔건만 잠들어있는 이는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았다. 꿈틀거리는 손이 천천히 나가의 목을 향해 다가간다.
 다가가고, 다가가고, 붙잡고.
 그리고 사냥감이 눈을 뜬다.

 “케이건?”

 목을 비틀려면 지금이 기회야. 지금이 아니면 없어! 내면의 키탈저 사냥꾼은 외치고 있는데 케이건은 나가의 목에서 나오는 미성에 귀가 멀어 손을 더 움직이지 못했다. 그 상태로 굳어 몸을 일으킬 생각도, 그렇다고 손에 힘을 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비늘이 선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가, 왕, 사냥감, 그리고….
 비늘 선 손이 가만히 뻗어와 그의 뒷머리를 끌어당긴다. 괜찮아,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말하는 그 말에 키탈저 사냥꾼도 아라짓 전사도 아닌 케이건 드라카가 돌아왔다.

 “사모.”
 “그래, 케이건.”
 “차라리 맹세를 하게 해줘.”
 “싫어.”
 “내가 또 너를 죽이려 할지 모르는데도?”

 오늘처럼, 키탈저 사냥꾼이 되살아난 오늘처럼. 사냥꾼은 노련해서 한번 한 실수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지. 주저 없이 사냥감의 목을 틀어 꺾을 거야. 그 때에는 네 목소리에 막히는 일 또한 없을 거야.
 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는 한 사내를 끌어안으며 나가는 들리지 않을 니름을 발산한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널 안을 수 없잖아, 케이건.]

 사내는 없는 대답을 헤아리며 흐느끼고 여자는 전하지 못하는 대답에 그저 전해지기를, 전해지기를, 상대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준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둘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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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셜] 성냥

2차 창작 2015. 9. 18.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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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다. 마이크로프트는 눈앞에 가득 쌓여있는 서류들에서 잠시 눈을 떼고 그 위로 두 손을 묻었다. 시야가 깜깜하다. 우습게도 눈을 감는다고 바로 암흑이 오는 건 아니다. 요상한 빛무리들, 갈색일 때도 있었고 노란색일 때도 있었으며 때로는 붉은 빛이었다. 붉은 빛무리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으며 아른거렸다. 그것은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마이크로프트는 잠깐이지만 추억이라는 것에 시간낭비를 하기로 결심했다.


 형, 깜깜해. 아직도 그 소리가 선연했다. 그들의 사이가 지금보다 조금 더 가까웠을 때의 목소리였다. 셜록의 세상은 온통 마이크로프트밖에 없었을 시절. 그들은 종종 부모의 눈을 피해 다락방으로 숨어들곤 했다. 다락방에는 먼지 쌓인 책들과 콤콤한 냄새가 나는 유화 그림들이 가득했고 그밖에도 그들이 밖에선 잘 보지 못하는 것들로 들어차 있었다. 먼저 동생을 올려주고 나서 올라가면 셜록이 두리번거리며 마이크로프트가 언제 올라오나 찾는 시선이 즐거웠다.

 둘이 올라오면 비좁은 다락방이 더욱 좁아졌다. 그들의 그늘로 인해 깜깜하게 시야가 가려지는 시간이 좋았다. 셜록은 더듬거리며 마이크로프트의 팔이나 어깨를 부여잡기 마련이었고 그때마다 뿌듯한 소유욕을 느꼈다. 조금만 있어보렴. 지금만큼은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의 주인이었고 셜록의 유일한 세상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붙였다. 화하게 어둠을 좀먹고 붉은 불빛이 올라오고 동생의 하얀 얼굴이 조금이나마 생기있게 보였다.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불빛을 보고는 환해지는 동생의 표정에 마치 조물주라도 된 양 기분이 좋았던 그이다.

 마이크로프트와 셜록은 그 다락방 안에서 타들어가는 성냥불을 의지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 얘기, 가족 얘기, 그 밖에 돌아가는 시사와 추리소설의 범인과 시덥잖은 사건들의 전망들. 마이크로프트는 그런 얘기를 하는 셜록을 읽는 일이 더 즐거웠다. 10의 9는 대부분 마이크로프트의 계산에 맞는 것이었고, 1은 약간의 틀어짐이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일부러 그 틀어짐을 제 계산대로 고쳐주곤 했고 셜록은 지금과는 달리 순순히 그의 명령에 따랐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희열을 느꼈는지, 지금도 마이크로프트는 속이 울렁거린다.

 성냥이 하나 타들어가서 후, 입김을 불어 끌 때마다 셜록은 어깨를 움찔거리곤 했다. 그러다가 다시 성냥을 켜고 나면 표정 또한 다시 밝아졌다. 이 다락방은 마이크로프트의 소유, 불빛 또한 마이크로프트의 지배하에, 그리고 셜록은 그 모든 것에 녹아있었음이다. 그것을 즐기다 보면 어느새 성냥갑은 텅텅 비었고 이젠 둘만의 왕국에서 내려갈 시간이었다.


 그런 때가 있었지. 마이크로프트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잠시 고민을 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의 시간낭비는 조금 더 길어질 예정인 듯 했다. 그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 베이커 가 221B로. 차에 올라타 예전보다, 그리고 그 때보다 무거워진 몸을 늘어트리며 마이크로프트는 주머니에 있는 것을 손 안에서 주억거렸다. 네모난 성냥갑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그는 성냥갑에서 성냥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 붉은 불빛 안에는 돌아오지 않을 추억이 녹아 타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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