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심화야 20회차

서심화야 2015. 4. 23. 00:44

 

'4분 3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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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롬츠 대령님, 제이미 러셀 소위입니다. 못 뵌 시간만큼 드릴 인사가 많습니다만, 기다리시는 대답을 위해 생략하는 불충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결과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상부에서 기대하셨던 수치를 훨씬 넘는 대성공입니다.

 이 실험 결과는 무수한 방향으로 응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제와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처음 이 실험을 들었을 때 저는 상당히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작 상황 하나 던져준다고 인간이 그리 멍청한 동물이 될 줄은 몰랐던 것이지요. 전 아직도 많이 부족한 위치인 모양입니다. 상부의 계획과 너무도 똑같이, 그보다 더 완벽히 흘러가는 상황에 저는 정신을 제대로 잡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저희는 정말로 상황만을 제시해주었을 뿐입니다. 고립된 환경, 어떤 언론도 비치지 않을 곳, 그 안에서의 두 종족(種足). 인간과 인간이 아니라 암시된 자들을 섞어놓았을 때의 그 지옥이란. 이것이 밖으로 알려진다면 우리는 새로운 단어를 창조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부도덕이라는 단어의 상위 개념으로요.

  자꾸만 잡설이 섞이게 되는군요. 사과를 드립니다, 대령님. 사실 저도 이 간극 속에서 물들지 않기가 힘듭니다. 이성적인 관조를 위해 실험 외의 다른 것들을 최대한 생각하려 노력하지요. 하지만 이젠 좀 더 세세한 실험의 결과를 적으려 합니다. 다시 이 편지를 읽으실때는, 아래 부분부터 보셔도 괜찮을 겁니다. 표시를 해놓을까요?

 지금부터 쓸 내용은 현재 이 시간에도 진행, 심화중임을 알려드립니다. 저희는 이 아우슈비츠로 죄수들을 끌고 오면서 일부러 거친 모습을 보이라고 명령했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간수들을 향한 일종의 메시지였지요. ‘이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면서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라는, 굳이 따지자면 그들에 대한 배려정도가 될까요. 어찌되었든 그것은 부차적이고, 가장 큰 이유는 이런 실험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만.
 저희가 간수들에게 시킨 명령들은 제가 생각해도 비인간적이고 가혹한 것들이었습니다. 사실 초반에 그리 기를 잡았다지만 전 매순간 매끄럽지 못할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방비책까지 새워두고 있었지요.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돌아갔습니다.
 간수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죄수들에게 가학적인 행동을 퍼부었습니다. 모든 야외활동을 네 발로 기게 만들고, 그들을 채찍질하면서 짖게 만들고, 음식에 분뇨를 타고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그슬리는 등 차마 글로 다 적지 못할 일들을 무수히 행하더군요. 죄수들을 벗겨 탑마냥 쌓아놓고, 그 앞에서 웃는 낯으로 사진을 찍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명합니다.
 대령님,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동족을 살해할 수 있는 건 그들이 낯설기 때문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 무수한 사람들 속 하나, 죄책감이 채 형성되기도 전에 군인은 총을 쏩니다. 만약 서로 총을 겨눈 상대가 낯이 익은 얼굴이라면 어떨까요.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총을 쏠 수 있을까요. 그런 상황이 온다면 저는, 불충한 말이겠지만 감히 주저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닙니다. 몇 주를 함께지냈다면 적어도, 정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연민은 존재해야 하지 않습니까. 기르는 짐승에게라도 그러하듯 말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네, 상부에서 예상하던 모든 반응을 그렇게 입력되기라도 한 양 행동해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준 것은 ‘상황’ 하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저는 이 결과에 성취의 기쁨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낍니다.

 지금도 밖에선 낄낄거리는 간수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군요. 아마 351번을 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351번은 유독 괴롭힘을 많이 받는 어린 이슬람 교도 입니다. 남자이면서 곱살하게 생겼고 겁이 많지요. 성적으로 희롱을 많이 당합니다. 남자 간수들에게뿐만 아니라 여자 간수들에게도요. 대령님은 군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내버려두고 있습니다. 벌어지는 모든 일이 실험의 일환이라 생각이 듭니다.
 곧 야외 훈련 시간입니다. 이만하면 중간 결과를 알려드리는 데에는 부족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슬슬 이 글을 끝맺고 잠시 나가 상황을 지켜본 후 편지를 발송해야겠습니다. 사모님께서 제 아내와 딸을 살뜰히 챙겨주신다는 서신을 얼마전에 받았습니다. 사모님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또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정부 당국과 대령님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정부 당국에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제이미 러셀 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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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노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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