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심화야 22회차

서심화야 2015. 4. 23. 00:45

 

'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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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상품은 수년 전, 무수한 논란이 되었던 K화백의 ‘자화상’입니다. 여기 모인 분들이라면 이 작품에 대해 다들 잘 알고 계시겠죠? 보십시오, 이 새빨간… 네, 여기까지만 얘기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경매가는 500부터 시작합니다.”

 

 “국선 변호사들을 모두 거절했다고요, K씨.”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청년의 말에 죄수복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갓 감옥에 들어간 죄수들이 늘 그렇듯 수척하고 퀭한 모습이었다. 분명 변호사 선임을 거절하고 국선 변호사들조차도 물렸는데, 그럼에도 자신에게 먼저 찾아온 청년을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실낱같은 자신의 명예도 이번 일로 바닥에 나뒹굴었을 텐데 대체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지. 청년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남자는 두려웠다.

 “그렇습니다. 어떤 변호인도 받지 않을 예정이고요. 그것이 목적이셨다면, 이만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 잠시만, 잠시만요. 저는 그런 목적으로 온 게 아닙니다. 물론 제가 변호사라서 좀 더 쉽게 당신을 만날 수 있었지만…. 원치 않는 변호를 할 생각은 없어요.”
 “그럼 나를 왜 불렀습니까? 이런 꼴인데 의뢰라도 하러 왔습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히스테릭해지자 청년은 작은 동작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직 변호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새내기였지만 사람을 다루는 법만큼은 능숙했다. 아니면 아직 몸에 배지 않은 능숙함을 연기하는 것인지. 간단히 남자를 진정시킨 청년은 앉아있는 의자를 책상 쪽으로 좀 더 끌어왔다. 남자와 청년과의 거리가 조금 더 좁혀졌다. 의도적인 침묵이 잠시 흐르고, 청년은 남자를 향해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남자에게 지나치게 익숙한 것이었다. 덜컹, 급히 의자에서 일어나기 위함이었는지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책상이 흔들렸지만 청년은 어, 무릎 괜찮습니까? 하고 잠시 웃은 후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당신의 ‘자화상’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 작품에 반해버렸거든요.”

 

 [다, 다 말하면…그럼 나 가둬 줄 거예요? 제발, 제발 나를 아무도 없는 곳에 데려다줘요! 자, 자, 자화상…그 미친, 미친 작품, 맞아요! 그거 사람을 먹었다고요! 아니, 아니, 사람이 스스로 먹혔어. 괴물이야, 그건! 나, 나더러 그림을 그리라고 했어요. 그 사람, 날 가두고! 아무것도…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자꾸, 자꾸 그림을 그리라고…. 막, 이상한 가루를 내게…그러면 기분이 이상했어요. 마약, 마약인가? 다른 화가들도 그랬다면서, 가끔은, 이상한 초록색 술…. 싫다고 해도 강제로 그랬어! 버, 버, 벗어나려고 계속 그림을 그렸어요. 근데…제대로 된 그림이, 나오질 않았어. 나, 나도, 그 사람도, 만족을 못 했어. 그만두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자꾸 괜찮다고 그랬어요. 다시 그리면 된다고, 응, 그러면 된다고! 며, 며, 몇 번이고 다시 그리고, 찢고…그날도 그 사람이 강제로 가루를, 그게 든 봉투를 내 얼굴에 씌웠어요. 그랬는데…가, 갑자기 그 사람이, 그림으로! 싫어, 가지 마! 거기 가면 먹힌다고! 가지 마요, 어머니, 아…아아악! … … … 그리고, 흐, 정신을 차렸는데…내 손에, 피가…나는 그것들을 치웠고, 망할 자화상…출품했어요. 그건, 정말로 내 자화상이었어. 그 끔찍한 그림을 치웠는데도, 자꾸만…자꾸만 내 역내가, 집안에, 그리고 당신들한테…. … … … 그게 전부입니다. …흠, 박 형사. 일단 녹음기 꺼.]

 

 문을 닫고 나온 청년은 히죽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방금까지 있었던 문 너머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지만 청년은 개의치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피를 먹은 그림이라니, 그것 참…대단하잖아! 품 안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자신의 남은 일정을 체크하며 남자는 걸음을 재게 놀렸다. 일단 그의 그림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해. 이런 기막힌 그림을 창고 속에 썩히게 둘 순 없지! 나든, 다른 사람이든, 그 진가를 아는 자가 가져야 해! …언젠가 감옥에서 나올 그를 위해서라도.
 검은 제네시스 쿠페의 문이 탁 닫혔다. 차는 곧 경쾌한 배기음을 내며 교도소 밖으로 빠져나갔다.

 

“5천! 더 없으십니까? 네, 거기 5천 백! 5천 3백! 5천 5백! 네? 오, 세상에. 6천 나왔습니다! 상일그룹 사모님이시군요. 더 없으십니까? 그럼…네, 이번 K화백의 ‘자화상’은 6천에 낙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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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도노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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