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하나 잎 하나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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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글↓
칼 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 “대사제님께서 내일 의식이 있으니 준비하라신다.”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지나치게 짤막한 어투였음에도 사내는 고개를 굽실거렸다. 사내는 결코 성격이 유순한 자도, 어린 이의 혈기를 웃으며 넘어가주는 자도 아니다. 익숙할 윽박지름 대신 어색한 웃음을 보인 이유는 눈앞의 검은 사제복 때문일 것이다. 말을 섞은 것조차 불쾌하다는 듯 침을 탁 뱉으며 돌아서는 어린 사제를 쩔쩔매며 배웅한 사내는 그제야 표정 가득한 비굴함을 풀었다. 사내는 익숙한 연기자였다. 잠시의 무대에서 내려온 사내는 겅정거리는 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터벅, 터벅, 퍽, 터벅. 궂은일을 하는 탓에 허옇게 튼 손이 문고리를 돌렸다. 낡아빠진 문은 한 번에 열리는 법이 없었다. 문과 몇 번의 짜증을 담은 신경전 끝에야 텅 빈 집이 제 속내를 보였다. 외투를 벗고, 고릿한 땀과 피의 냄새가 나는 셔츠를 찬 공기가 반겼다. 남들은 날씨가 추워진다며 10월부터 장작을 때기 시작하는데, 벌써 12월에 접어드는 계절이건만 그는 여태껏 장작은커녕 나뭇가지 하나 땐 적이 없다. 아들놈이라도 집에 있었으면 그 체온 덕에 조금은 훈훈했을 것을. 아들은 일주일 전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를 데려와야 할 어미는 이미 오래전 도망치고 없었다. 그 에미에 그 자식이라니까. 온기 대신 소리 없는 투덜거림이 방 안을 채웠다. 애비는 지 먹여 살리겠다고 사람 목이나 따고 있는데. 다른 놈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네놈은 그러면 안 되지. 제 입에 쳐 넣는 밥술도 따지고 보면 다 애비가 사람 죽여서 번 돈 아냐. 지 에미마냥 발랑 까져서 겉돌기나 하고. 망할 새끼 같으니. 한바탕 상대 없는 짜증을 터트린 후에야 사내는 몸을 일으켰다. 어기적어기적 작은 부엌의 선반을 연 사내의 손엔 술병 하나가 들려있었다. 의식을 치르기 전날이면 사내는 항상 술을 마셨다. 남들은 죽이고 난 후에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하는데 사내는 반대였다. 오히려 목을 딴 후에는 피가 튄 옷을 빨리 빨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생명의 존엄성이니, 도덕이니, 그런 성가신 것들은 늘 전날에 찾아왔다. 오크통 위에 걸터앉은 사내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들을 다 갈라진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말라서 비틀어진 빵조각들이 부스스 떨어졌다. 사내의 저녁이자 술안주가 될 것들이었다. 사내의 손에서 술병 마개가 뽁, 소리를 내며 뽑혔다. 주둥이에서 새어나오는 술내가 마시기도 전에 취할 듯 독했다. 여긴 시건방진 사제도, 잔소리할 아내나 아들놈도 없는데 뭣하러 예의를 차리나. 사내는 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입안의 쓴 맛과 머리가 핑 도는 현기증이 사라지기 전에 빵조각을 씹었다. 죄책감이 목구멍에 기름칠이라도 한 모양이다. 안주도 변변치 못한 독한 술이 거뜬히 넘어갔다. 아직은 현실이 취기를 이긴다. 사내는 제 현실을 생각했다. 시골짝 한 구석에서, 대도시라면 당장 화형을 면치 못할 이단의 종교에 휘둘려 살아가는 삶. 그리고 그 속에서도 제물이라는 명목의 어린 소녀소년들을 난도질해가며 경멸과 멸시를 먹고 사는 자신. 어쩌다 저라는 인간이 이리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저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제물들을 떠올린 사내는 한 손으로 눈을 내리눌렀다. 대부분 자신의 아들과 비슷한 나이대의 아이들이었다. 마을의 신도들에게 사제들은 그 아이들이 신이 보낸 제물이라고 했다. 개소리. 스스로 제물이 되기 위해 내려온 아이들이 그리 발버둥을 치고, 억지로 입을 틀어막기 전까지 살려달라고 보내달라고 애원을 할 리 없지 않은가. 필히 어딘가에서 붙잡아온 아이들일게 뻔했다. 이 시골 밖의 도시라던가, 혹은 고아로 굴러다니는 아이들이겠지. 문득 사내는 구역질이 났다. 아직 술은 반도 비우지 못했는데. 내일은 또 얼마나 인간성을 버려야 할지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 콧물 눈물이나 훌쩍이는 아이가 걸린다면 좀 나은 날이었다. 멱을 따는 데도 수월하고, 살아있는 동족을 죽인다는 죄책감도 덜했다. 소리를 꽥꽥 지르고 발버둥을 치는 아이가 가장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멀찍이서 바라보는 신도들에게 최대한 그 난장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신경써야 했다. 내리누르고, 부러트리고, 틀어막고 욕을 하고 난도질하고. 그러고 나면 옷은 물론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이런 날은 피비린내도 쉽게 가시질 않았다. “그러니까, 씨이발.” 어차피 뒤질 거면 좀 닥치고 죽어 달라 이거야. 어느새 취기로 눈이 풀린 사내의 입에서 쌍소리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인생 말아먹은 새끼라지만 그렇게 지저분하게 끝내고 나면 좋은 줄 아냐고.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씨발, 어쨌든 신에게로 가는 죽음이래잖냐. 어차피 니들이 살아봐야 나 같은 놈이 되기밖에 더 하겠어? 너희들이 죽으면 너희도 좋고, 나같이 더러운 일 하는 놈들도 좋고, 다 좋은 거라고. 그러니까, 어떤 재수 지지리 없는 새끼가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응? 조용히 가자. 조용히. 제발 좀 부탁이라니까, 씨이발.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이 네 모금. 어느덧 취기는 현실을 가렸다. 사내는 안개가 낀 듯 부옇게 흔들리는 시야를 문 쪽으로 돌렸다. 눈앞이 어지러운 탓인지 굳게 닫혀있어야 할 문이 일렁였다. 이쯤이면 소리가 나야 하는데. 덜컹덜컹, 삐꺽. 망가진 문을 억지로 열고는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은 소년이 보여야 하는데. 문은 열릴락 말락, 소리는 들릴락 말락. 오지 않는 아들을 끝없이 기다리며 살인을 하는 아버지는 술병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술을 들이켰다. 빵조각을 씹었다. 평소보다 절반은 좁혀진 눈에는 다 갈라져 나무껍질이 일어난 탁자가 제단처럼 보였다. 돼지가죽으로 만든 술병이 날 선 칼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 좀, 구원해달라고. 응? 사내는 제 손에 쥐인 칼을 들어 능숙하게 내리찍었다. 난도질, 난도질, 난도질. 술병이 몇 번이고 탁자에 내리쳐져 나무톱밥이 튀었지만 사내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에 담겨있는 것은, 제단과, 칼과, 그리고…. 사내는, 어째서인지 제 앞에서 난도질당해 피를 흘리고 있는 이 제물이, 웃기게도 자신과 아내와 아들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