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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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가 좀 늦었죠. 죄송해요."
"괜찮아요. 오늘은 학생 상담 말고는 일정이 없었어요. 여기로 앉을래요?"
흔히 사람들이 정신병원의 상담실이라고 한다면, 아무 무늬도 없는 새하얀 방에 낡은 탁자와 의자 두 개를 떠올릴 것이다. 그럴 수밖에, 그곳은 일종의 접근이 금기시된 공간이니까. 대부분의 환자들은 그런 모습을 상상하며 가려던 발을 다시 묶고, 용기내어 도착했음에도 문고리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뒤돌아 가는 경우도 많다. 분위기라는 게, 편견이라는 게 그렇게 큰 작용을 한다.
그러나 오늘 이 방에 들어온 H는 다르다. 그녀는 이 병원에 발을 들이밀 때부터 다른 이들의 눈에 확 띄었다. H같은 여고생이 정신병원에 오는 건, 평범한 이들의 눈에는 이상해 보일 수 있겠지만, 이 공간 안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자주 있는 일이다. 요즘 들어 정신병원을 찾는 학생들의 수는 몇 년 전에 비해 배로 뛰었다. 그 이유 또한 단순히 상상할 수 있는 학교 폭력 같은 걸 넘어서 아주 다양하다. 그네들은 더이상, 사회의 어두운 일면에서 보호받기만 하는 입장은 아니란 소리다.
보통 이 곳에 들어서는 학생들이라면 대부분 고개를 푹 숙인 채, 어딘가 뒤틀린 모습들이다. 그 아이들은 아직 매끈한 누에고치를 둘둘 말아 자신을 감추는 방법을 모른다. 빠끔히 눈만 내밀어 자신을 보고 있는 누에고치 속에서, 그들은 더욱 주눅 든 표정을 짓는다. 결국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뛰쳐나가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런 모습을 보며 누에고치들은 아무런 반응도, 그들을 잡으려 하지도 않는다. 이 어린 짐승들의 벌어진 상처들은 누에고치들이 꽁꽁 감춰오고 있는 흉터 자국을 다시 자극한다. 그건 꽤나 고약한 경험이다.
H는, 그런 누에고치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밖을 보기 위해 벌어진 틈으로 더욱 얼굴을 가까이 대게 하는 존재였다. 또래의 학생들이라면 전부 갖고 있을 약간의 다크서클 빼고는 그 어떤 그늘도, 뒤틀림도 없는 모습으로 그녀는 들어왔다. 조금 서두른 듯 들뜬 치맛자락이 채 가라앉지도 않은 모습을 보며, 누에고치들은 갑작스레 자신의 공간에 들어선 생기에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본다.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데스크에서 장소를 물을 땐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까지 들린다. 그녀의 모습은 곧 사라졌지만, 그들은 아직 남아있는 생기의 잔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갈색 옥스퍼드화가 밟고 간 복도를 멍하니 바라본다.
A는 자신의 앞에서 발갛게 들뜬 얼굴을 손바닥으로 탁탁 가라앉히는 H를 보며 바깥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환자를 계산하기 위해 미리 깔아둔 생각들을 뒤엎는다. 평범한 이들처럼 대해서는 실속을 얻지 못하는 케이스다. 먼저 옆에 비치된 물을 한 잔 따라주자 H가 활짝 웃고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단숨에 들이킨다. 가벼운 호의로 상대의 마음에 똑똑 노크를 해 뒀으니, 이제는 벨을 눌러 주인이 나오게 할 때이다.
"교복 보니까 여기 근처에 OO고등학교네요. 맞죠? 나도 거기 출신이에요. 이 동네 토박이라서."
"와, 선배님이시네요! 후배니까 더 잘 봐주실거죠?"
". 자, 후배님. 무슨 일로 여기 찾아왔는지 편하게 얘기해볼래요?"
"음 물론이죠, 전 불면증을 앓고 있어요. 도통 잠에 들질 못해요. 힘들게 잠을 자도 저도 모르는 것에 놀라서 금방 깨어나곤 했어요. 다니던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오게 됐어요."
불면증, H의 말에 A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머릿 속은 바쁘게 굴러간다. 가벼운 스트레스성이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인이 문을 열어주었으니 이제 그네의 집으로 들어가 자세히 알아 볼 차례이다. 한 발짝, 난간을 딛는다. 실례하겠습니다.
"평소에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었나요? 아니면 생활 패턴이 갑자기 바뀌었다던가."
"생활 패턴은 그대로에요. 스트레스는...가끔 쓰고 있던 자소서를 던지고 싶긴 하지만 그렇게 심하진 않은데.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부끄럽지만 저 공부 잘해요."
"부럽네요. 나는 재수해서 의대 왔는데. 스트레스라는 건 이미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본인은 분간하지 못하지만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을 수도 있어요. 불면증이 생긴 건 언제부터에요? 그때부터 한 5년 전까지로 해서 뭔가 큰 트라우마가 될 만한 일은 없었어요?"
"자다가 놀라서 깼던 건 3년 전부터 있었고, 잠들지 못한 건 대략 한달쯤 전부터에요. 그리고, 트라우마."
H의 표정이 일순 바뀐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세한 변화지만, 이미 수없이 이런 일을 겪은 A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때쯤이 되면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가도 상대는 말리지 않는다. 오히려 소파에 앉아 있으라며 가벼운 음료수와 과자들을 내놓고, 그 동안에는 자유롭게 집 안을 둘러볼 수 있다.
"...저, 이거 부모님한테도 말 안 했어요."
"지난번에 접수할때도 들었겠지만 우리는 절대로 상담자의 신변을 밝히지 않아요. 정 불편하다 싶으면 말하지 않을 권리도 있어요. 잠시 고민해볼래요?"
"으응, 아니에요. 그럴 거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테고. 저는요, 15살때 성폭행을 당했어요."
이렇게까지 차려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집이 참 좋네요. 혹시 불편하시지만 않다면 구경시켜 주실 수 있나요? 다른 방들은 어떻게 꾸미셨는지 궁금해서요.
"학원이 끝나고 돌아오던 길이었어요. 시험기간이 얼마 안 남아서 좀 늦은 시각이었고요. 10분만 더 걸으면 집이 보이는 거리였어요. 차 한대가 제 쪽으로 다가왔고, 그 안에 있던 분이 창문을 내리고 저한테 말을 거셨어요.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아저씨였어요. 미안한데 전화 한 통만 빌릴 수 있냐고, 회식에 갔다 오는 길인데 배터리가 나가서 늦었는데도 가족한테 연락하질 못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알았다고 했더니 차 문을 열고 핸드폰을 받으셨어요. 어딘가로 전화를 거시던데, 곧 끊으시고는 아내가 화난 모양인지 전화가 꺼져 있다고 하시면서 웃으셨고요. 그래서 핸드폰을 돌려받고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절 차 안으로 끌어당기시더니...네, 그랬어요. 처음에 멀찍이 서 있을 땐 잘 몰랐는데, 가까이 붙고 나니까 술냄새가 확 풍기더라고요. 다 하고 나서...아저씨는 절 내려주더니 사라지셨고 전 아파서 울면서 집에 갔어요. 부모님은 이미 주무시고 계셨고 전 그 뒤로도 말씀드리지 못했고요. 그 이후부터였던 거 같아요, 잠자던 도중에 놀라서 깨는 건."
"이런...그런 일이 있었군요. 꺼내기 어려운 말인데 이렇게 해줘서 참 고마워요. 물론, 상담 내용은 절대로 비밀에 부쳐지니까 걱정 말고요."
성폭행 트라우마로 인한 불안증, 계속 잠에서 깼던 건 그 이유에서라고 A는 판단한다. 그럼 한 달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불면증은? 한창 예민한 입시철 시기와 겹쳐서일수도 있고, 그 나이 대가 그렇듯 자극적인 소재에 접하게 되었을지도. 주로 앞의 두개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특별한 경우의 수를 제외시킬 수는 없겠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물 좀 마시겠다는 A를 H는 빤히 바라본다. 그 시선에 담겨있는 감정은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섞여있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게 잘 한 일일까, 진짜로 비밀을 지켜줄까, 그는 해결책을 줄 수 있을까...빈 종이컵이 휴지통으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A가 입가의 물을 훔치며 고개를 든다.
"학생이 겪고 있는 불면증은 그 일에 대한 불안이 원인일 가능성이 커요.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을 받았을 거에요. 그러기도 힘들겠지만, 시간이 흘렀으니 어느정도는 무덤덤해졌다고 해도 속으로는 분명 그 트라우마가 남아 있어요. 단순히 수면제 처방만 하는 것은 임시 방편밖에 안 돼요. 아니, 오히려 더 악화시킬 수도 있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꾸준한 상담과 치료를 통해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야돼요. 이미 일어난 일을 없던 것으로 할 순 없고, 그 때 느꼈던 감정도 다른 것으로 바꿀 순 없어요. 중요한 건 그 경험에서 벗어나는 거에요.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기억은 분명 학생의 깊은 곳에 자리잡았고 자꾸만 돌이켜보게 하고 있어요."
이제 H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A의 물 흐르듯 이어지는 말을 경청하고 있다. 그는 계속 강조해서 말한다. 과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두렵고 무서웠을 과거와 현재는 다르다고. H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전부터 가져왔던 생각들이 그의 말을 들으면서 더욱 확실해진다. 스스로의 노력이 가장 중요해요, 쐐기를 박는 듯한 A의 말에 H는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낸다.
"감사해요, 선생님.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이제는 바꿀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겪었던 것들...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해보도록 할게요. 선생님도 도와주실거죠?"
"물론이죠. 내가 할 수 있는 성심껏 도와줄거에요."
"다행이다. 선생님이 없으시면, 고치기 힘들 것 같거든요."
그 순간 눈에 띄지 않던 작은 쪽문 하나를 발견한다. 저긴 뭐죠? 아, 들어가 봐도 되나요? 문을 열고, 그 안을 확인하는 순간,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공간이 지워진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오랜만이야. 경기, 오 8047.
"너, 너...왜..."
"있잖아요, 전 아직도 기억해요. 비틀거리면서 사라지던 그 차 넘버요. 한 달 전에 학교에서 동창회가 있었잖아요. 그 날 선생님을 봤어요. 정확히는, 선생님이 타고 계신 차의 넘버를."
"잠깐, 일단 그 칼부터 내려놓고..."
"선생님. 이 상담 내용, 전부 비밀 맞죠?"
도와주신댔잖아요. 할 수 있는 성심껏. 저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거에요. 그러니까, 선생님. 안녕.
오늘은 꿈도 없는 단 잠을 잘 수 있을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