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신용카드를 긁었다. 그리고 내 손에는 16만원이 찍힌 영수증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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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애들 생각은 도통 이해를 못하겠다. 뻑 하면 짜증을 내질 않나, 뭔 말만 하면 눈 흘기는 건 일상이고 한 번 욕이라도 튀어나오면 아주 사내놈들 저리 가라다. 말은 또 왜 그렇게 돌려서 하는지, 카톡 한 번 오면 그거 해석하느라 몇 십 분씩 골머리를 앓는다. (물론 그렇게 고민해서 답장을 보내면 늦는다고 또 화낸다.)
내 여자친구도 이런 전형적인 여자애이다. 아, 그렇다고 막 인터넷에서 나도는 것처럼 된장녀 같은 건 절대 아니니 오해는 말아줬으면 한다. 나처럼 남중 남고 나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랑 벌써 세달 넘게 사귀어주고 있고 더치페이도 잘 하고, 게다가 얼굴까지 예쁘다. 자랑하는 게 아니라 진짜 한가인 닮았다. 진짜. 위에 말했던 여자애들처럼 입이 좀 험한 거랑 손이 매운 게 흠이긴 한데, 이정도야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다.
어찌됐든 이런 사랑스러운 여친과의 백일이 내일이다. 평소에도 가난한 대학생이라 잘 챙겨주지 못해서 이번 백일만큼은 꼭 남부럽지 않게 해주려고 담배 살 거 덜사고, 맥주 일주일에 한 캔씩 절약해서 모은 돈이 20만원이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적어도 커플링쯤은 선물할 수 있겠지 싶어 기쁘다.
미리 봐두었던 악세사리 샵으로 들어가는데 절로 어깨가 으쓱거린다. 내가 능력은 별로 없지만 나름 신경은 많이 쓰는 편이라, 이전에 여친이 페이스북에서 좋아요 눌렀던 것들을 살펴보다가 이 샵을 알게 된 거다. 여기 로고가 적힌 선물 상자를 딱 내밀면 분명 좋아할 것이다. 내가 얼마나 사려깊은 남자인지 다시 알게 되겠지.
가장 맘에 드는 것을 고르려는데 문자가 온다. 웬 문자? 핸드폰 액정에 뜬 여친 사진을 슥 밀고 문자를 확인한다. 과대다. [전공책 공동구매 신청하신 분들 어서 18만원 입금하세요. 이틀 남았습니다.]
...이건 꿈이다.
백일때문에 전공책 구매를 잊고 있었다니, 내 지능은 해파리 수준이 분명하다. 딱 수량에 맞춰서 공동구매를 했기 때문에 안 내면 과에서 엄청나게 까일거다. 하룻밤 안에 18만원이라는 돈을 어떻게 구해! 백일을 이만원으로 버틸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막막하다.
여친한테 양해를 구해볼까, 하는 생각에 카톡을 켰다가 다시 끈다. 아무리 내 여친이 마음씀씀이가 넓다지만 이번 백일도 흐지부지 보내면 분명 갖은 쌍욕과 함께 뺨 맞고 차일게 뻔하다. 지난번 50일때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서 잔뜩 깨졌는데 하물며 이번엔 백일이다.
아까 봐두었던 커플링 가격표를 확인한다. 16만원. 나름 괜찮다고 생각했던 가격이 문자 한 통으로 인해 이렇게 비싸보일 줄이야. 상품을 집어드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저 샵 직원이 악마로 보인다.
남들이 들으면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 중에는 여자때문에 공부고 뭐고 포기한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을거다. 이성적으로 봤을 땐 당연히 전공책을 사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세상이 이성으로만 돌아가나? 가끔은 자기감정에 충실해야 할 때도 있어야 한다. 인간미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거 아니겠나. 이게 변명이라면 분명 인간미 넘치는 변명일거다.
떨리는 손으로 신용카드를 건넨다. 결제 되셨습니다, 웬지 좋게 들리지만은 않는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영수증이 쳑 건네진다. 흰 종이 위에 적혀진 16만원이라는 글자가 유난히 크게 보인다. 16만원, 16만원.